신앙을 잃거나 바꾼 뒤 나의 세계관을 어떻게 다시 구성할까?
신앙을 잃거나 바꾸는 일은 하나의 의견을 수정하는 것보다 훨씬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세계의 질서와 삶의 목적, 도덕의 기준, 죽음 이후의 기대가 달라지고 가족과 공동체의 관계도 흔들릴 수 있다. 이전의 자신과 조상을 배신한 듯한 죄책감, 익숙한 답에서 벗어난 자유, 의례와 소속을 잃은 공백이 동시에 찾아온다. 새로운 입장을 빨리 정하지 못하면 불안정한 사람으로 보이거나 이전 공동체와 새 공동체 모두에서 의심받을 수 있다. 이 질문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세계관이 생각의 체계이면서 몸의 습관, 관계, 삶의 시간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재구성 과정에서는 더 이상 믿기 어려운 교리와 제도, 여전히 중요하게 남은 가치와 실천, 잃은 관계와 새로 얻은 자유를 나누어 볼 수 있다. 신앙 변화가 논리적 의문에서 시작되었는지 권력 남용과 상처, 다른 전통과의 만남, 삶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따라 필요한 이해가 달라진다. 기존 믿음에서 위로받았던 기억과 그 공동체에서 겪은 피해도 함께 사실일 수 있다. 새로운 종교나 비종교적 관점을 탐색할 때에는 취약한 시기에 강한 확신과 빠른 소속을 요구하는 집단이 또 다른 의존을 만들 가능성도 살펴야 한다. 모든 질문에 즉시 답하는 체계가 재구성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기도를 멈춘 사람이 침묵과 감사의 시간을 유지하거나, 종교 공동체를 떠난 사람이 시민 모임과 봉사에서 소속과 책임을 이어 갈 수 있다. 교리를 바꾼 사람도 가족의 명절 의례에 문화적 의미로 참여할 범위를 협의할 수 있고, 공개가 안전을 위협하는 환경에서는 변화의 시점을 스스로 선택할 필요가 있다. 성직자나 오랜 신자는 직업과 주거, 인간관계가 신앙과 결합되어 있어 변화의 비용이 더 클 수 있다. 다른 종교로 개종한 사람은 새 전통의 언어를 배우면서 이전 삶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수 있다. 비종교적 전환에서도 윤리와 죽음, 공동체에 관한 기준을 새로 구성해야 한다. 세계관을 다시 구성한다는 말은 이전 믿음을 완전히 지우고 빈자리에서 새 체계를 만드는 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남은 가치와 기억을 비판적으로 이어 가고 새로운 지식과 관계를 통해 확신과 유보의 범위를 조정하는 과정이다. 이 질문은 변화가 배신인지 성장인지 한 단어로 판정하기보다 무엇을 잃고 얻었으며 어떤 삶을 가능하게 하는지 이해하게 한다. 현재의 경험과 이성에 정직하고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삶을 지속할 실천을 제공하는지가 중요한 검토점이 된다. 재구성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번 수정될 수 있으며 공백과 불확실성도 그 과정의 일부다.
1. 폴 리쾨르 — 비판을 통과한 상징 해석과 새로운 자기 이해
폴 리쾨르(1913~2005)는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 상징과 이야기, 해석을 거쳐 이루어진다고 탐구한 철학자다. *La symbolique du mal* (악의 상징)은 오염, 죄, 죄책과 악에 관한 신화들을 읽으면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사유한다. *De l’interprétation: Essai sur Freud* (해석에 대하여: 프로이트에 관한 시론)은 프로이트의 작업을 통해 의식이 자기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묻는다. 두 저작을 함께 읽으면 신앙을 잃거나 바꾼 뒤에도 비판과 의미의 탐구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La symbolique du mal*의 결론에서 리쾨르는 현대의 비판적 의식이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일으켰다고 인정한다. 신화가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설명한다는 믿음을 검토한 사람은 그 검토 이전의 상태로 단순히 돌아갈 수 없다. 그가 말하는 ‘두 번째 순진성’은 이러한 상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첫 번째 순진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든 하나의 것이 상실되었고,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었다. 그것은 믿음의 직접성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래의 믿음에 따라 성스러움의 위대한 상징 체계들을 더 이상 살아 낼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현대인은 비판 안에서, 그리고 비판을 통하여 두 번째 순진성을 향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해석함으로써 다시 들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학 안에서 상징이 의미를 주는 일과 그 의미를 해독하는 지적인 주도성이 서로 맺어진다.”
Paul Ricœur, *La symbolique du mal*, conclusion, “Le symbole donne à penser.” [저작 정보](https://books.google.com/books/about/La_symbolique_du_mal.html?id=qX-cnQEACAAJ)
“의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믿음이라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어떤 믿음인가? 물론 더 이상 소박한 사람의 첫 번째 믿음이 아니라, 해석자의 두 번째 믿음, 비판을 통과한 믿음, 비판 이후의 믿음이다. 나는 종교 현상학을 은밀하게 움직이며 그 외견상의 중립성 속에까지 숨어 있는 일련의 철학적 결정들에서 그것을 찾으려 한다. 그것은 해석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믿음이지만, 해석을 통해 두 번째 순진성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믿음이다. 이 믿음에 현상학은 듣고, 의미를 다시 모으고, 회복하기 위한 도구다. 이해하기 위해 믿고, 믿기 위해 이해한다는 것이 그 원칙이다. 이 원칙은 믿음과 이해의 ‘해석학적 순환’ 자체다.”
Paul Ricœur, *De l’interprétation: Essai sur Freud*, livre I, ch. II, §2, “L’interprétation comme récollection du sens.” [저작 정보](https://books.google.com/books/about/De_l_interpr%C3%A9tation_Essai_sur_Freud.html?id=Hz0_AwAAQBAJ)
“이것이 내기다. 철학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기 위해서는 전제 없는 철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이러한 사유 방식에 분개할 수 있다. 충만한 언어에서 출발하는 철학은 전제를 지닌 철학이다. 그 정직성은 자신의 전제를 명시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진술하며, 믿음을 내기로 발전시키고, 그 내기를 이해로 돌려받으려 시도하는 데 있다.”
Paul Ricœur, *La symbolique du mal*, conclusion, “Le symbole donne à penser.” [저작 정보](https://books.google.com/books/about/La_symbolique_du_mal.html?id=qX-cnQEACAAJ)
2. 제임스 파울러 — 믿음의 내용과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의 재조직
제임스 파울러(1940~2015)는 인간이 신뢰와 가치, 관계를 조직하는 방식이 생애 속에서 어떻게 발달하는지 연구한 신학자다. *Stages of Faith: The Psychology of Human Development and the Quest for Meaning* (신앙의 발달단계)에서 ‘신앙’은 특정 종교의 교리에 동의하는 행위보다 넓은 뜻을 갖는다. 사람은 무엇에 궁극적인 가치를 두고, 무엇을 신뢰하며, 자신의 삶이 어떤 세계에 속한다고 이해하는지를 통해 살아간다. 이러한 의미의 신앙은 종교적 소속을 바꾼 뒤에도 계속 문제가 된다.
제2장에서 파울러는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연구를 받아들여 신앙과 교리적 믿음을 구별한다. 다음 대목은 그 구별이 종교를 떠난 사람을 이해하는 데 왜 중요한지 보여 준다.
“신앙을 현대적 의미의 믿음과 동일시하는 이러한 축소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지 못하면, 믿음과 신앙 사이의 현대적 분리를 지속시키고 확대하게 된다. 신앙이 신조의 진술과 교리적 정식에 대한 믿음으로 축소된다면, 섬세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 없이’ 살아야 한다고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신앙을 타자에 대한 신뢰이자 초월적인 가치와 힘의 중심에 대한 충실함으로 이해한다면, 신앙의 문제와 종교적 신앙의 가능성은 다시 살아 있는 열린 문제가 된다.”
James W. Fowler, *Stages of Faith: The Psychology of Human Development and the Quest for Meaning*, ch. 2, “Faith, Religion and Belief.” [저작 정보](https://books.google.com/books/about/Stages_of_faith.html?id=bfnYAAAAMAAJ)
“제4단계는 청년 성인기에 가장 적절하게 형성된다. 그러나 많은 성인이 이 단계를 형성하지 않으며, 상당수에게는 삼십 대 중반이나 사십 대에 이르러서야 나타난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 단계는 두 가지 발달로 특징지어진다. 이전에는 중요한 타인들의 관계망에 의해 정체성과 신앙의 구성을 지탱하던 자아가, 이제는 타인에게 갖는 역할이나 의미의 합으로 더 이상 규정되지 않는 정체성을 주장한다. 이 새로운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아는 자신의 경계와 내적 연결을 의식하고 자신을 ‘세계관’으로 인식하는 의미의 틀을 구성한다.”
James W. Fowler, *Stages of Faith: The Psychology of Human Development and the Quest for Meaning*, ch. 19, “Stage 4. Individuative-Reflective Faith.” [저작 정보](https://books.google.com/books/about/Stages_of_faith.html?id=bfnYAAAAMAAJ)
“제5단계의 결합적 신앙은 제4단계의 자기 확신과 현실에 대한 의식적인 인지적·정서적 적응을 위해 억눌렀거나 알아차리지 못했던 많은 것을 자아와 세계관 안으로 통합한다. 이 단계는 상징의 힘이 개념적 의미와 다시 결합하는 ‘두 번째 순진성’(리쾨르)을 발달시킨다. 여기에는 자신의 과거를 새롭게 되찾고 다시 다루는 일도 있어야 한다. 자신의 ‘더 깊은 자아’의 목소리에 열리는 일도 있어야 한다. 특히 여기에는 자신의 사회적 무의식, 곧 특정한 사회 계층이나 종교 전통, 민족 집단 등에서 성장하면서 자아 체계 깊이 형성된 신화와 이상적 이미지, 편견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포함된다.”
James W. Fowler, *Stages of Faith: The Psychology of Human Development and the Quest for Meaning*, ch. 20, “Stage 5. Conjunctive Faith.” [저작 정보](https://books.google.com/books/about/Stages_of_faith.html?id=bfnYAAAAMAAJ)
“여러 해 동안 숙고한 뒤, 나는 ‘회심’이라는 말을 신앙의 내용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갑작스럽거나 점진적인 과정들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회심 과정과 별개로 일어나든 그 일부로 일어나든, 구조적 단계의 변화는 단계 변화라는 말로 구별해야 한다. 모즐리의 ‘수평적 회심’과 ‘강화 경험’이라는 용어들은 그가 정의한 바로 그 방식에서 매우 유용해 보인다. 이론적으로, 그리고 아직 입증할 수는 없지만 경험적 현실에서도 그러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우리는 형식적·구조적 단계 변화와 신앙의 회심적 변화 사이에 다음과 같은 관계들이 가능하다고 본다.”
James W. Fowler, *Stages of Faith: The Psychology of Human Development and the Quest for Meaning*, ch. 23, “Conversion and Stages of Faith.” [저작 정보](https://books.google.com/books/about/Stages_of_faith.html?id=bfnYAAAAMAAJ)
이어지는 설명에는 회심 없이 일어나는 단계 변화, 단계 변화 없는 회심, 서로를 촉진하는 변화, 단계 변화의 고통을 피하도록 만드는 회심이 모두 포함된다. 여기서 회심은 단순히 다른 종교로 소속을 옮기는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 삶의 중심 가치와 자신을 이끄는 이야기가 크게 재편되는 변화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종교를 유지했는지 떠났는지만으로 그 사람의 발달을 판단할 수 없다.
3. 프리드리히 니체 — 신의 죽음 이후 가치의 기원과 가치 자체에 대한 재검토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럽 도덕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탐구한 철학자다. *Die fröhliche Wissenschaft* (즐거운 학문)의 ‘신의 죽음’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인적 의견보다 훨씬 큰 사건을 가리킨다. 세계와 인간의 삶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던 신에 대한 믿음이 설득력을 잃을 때, 그 믿음 위에 세워진 도덕과 자기 이해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다. 신앙을 떠났다는 선언 이후에도 이 문제는 오래 남는다.
제125절의 ‘광인’은 이미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시장에서 신을 찾는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지만, 그는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니체는 무신론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 결과를 묻는다.
“우리는 이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풀어 놓았을 때 무엇을 했는가? 이제 지구는 어디로 움직이는가? 우리는 어디로 움직이는가? 모든 태양으로부터 멀어지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지 않은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아직 위와 아래가 있는가? 우리는 무한한 무 속을 헤매듯 떠돌고 있지 않은가?”
Friedrich Nietzsche, *Die fröhliche Wissenschaft*, §125, “Der tolle Mensch.” [원문](https://www.textlog.de/nietzsche/schriften/froehliche-wissenschaft/der-tolle-mensch)
“최근의 가장 큰 사건, 곧 ‘신이 죽었다’는 것,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한 믿음이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미 유럽에 첫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적어도 이 광경을 볼 만큼 눈과 그 눈의 의심이 충분히 강하고 섬세한 소수에게는 어떤 태양이 저물고, 오래되고 깊은 어떤 신뢰가 의심으로 뒤집힌 듯하다. 그들에게 우리의 오래된 세계는 날마다 더 저녁에 가까워지고, 더 의심스럽고 낯설며 ‘늙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건 자체가 너무 크고 너무 멀리 있으며 많은 사람의 이해 능력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그 소식조차 이미 도착했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물며 이 믿음이 무너진 뒤에, 그 위에 세워지고 그것에 기대며 그 안에서 자라났던 모든 것이 이제 함께 무너져야 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우리의 유럽 도덕 전체가 그러하다.”
Friedrich Nietzsche, *Die fröhliche Wissenschaft*, §343, “Was es mit unserer Heiterkeit auf sich hat.” [원문](https://www.textlog.de/nietzsche/schriften/froehliche-wissenschaft/was-es-mit-unserer-heiterkeit-auf-sich-hat)
“역사와 문헌학에 관한 약간의 훈련, 그리고 심리적 문제들에 관하여 타고난 까다로운 감각이 더해져, 나의 문제는 곧 다른 문제로 바뀌었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들을 만들어 냈는가? 그리고 그 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갖는가? 그것들은 지금까지 인간의 번영을 방해했는가, 촉진했는가? 그것들은 삶의 궁핍과 빈곤화, 퇴락의 징표인가? 아니면 반대로 그 안에서 삶의 충만함과 힘, 의지와 용기, 자신감과 미래가 드러나는가?”
Friedrich Nietzsche, *Zur Genealogie der Moral*, Vorrede, §3. [원문](https://www.nietzschemind.com/books/on-the-genealogy-of-morality/read/de/gm-vorrede-3/)
“이 새로운 요구를 말해 보자. 우리에게는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 가치들의 가치 자체가 우선 질문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자라나고 발전하고 변형된 조건과 상황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도덕을 결과, 증상, 가면, 위선, 질병, 오해로 보면서도, 또한 원인, 치료제, 자극제, 억제, 독으로 보는 지식이다. 지금까지 그러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았고, 갈망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 ‘가치들’의 가치를 주어진 것, 사실적인 것, 모든 문제 제기를 넘어선 것으로 받아들였다. 지금까지는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보다 더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데 조금도 의심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여기서 더 가치 있다는 것은 인간 일반의 증진과 유익, 번영에 더 기여한다는 뜻이며, 인간의 미래도 포함한다.”
Friedrich Nietzsche, *Zur Genealogie der Moral*, Vorrede, §6. [원문](https://www.nietzschemind.com/books/on-the-genealogy-of-morality/read/de/gm-vorrede-6/)
니체가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그릇된 행동 몇 가지가 아니다. 무엇을 선하다고 부르는지, 그 평가가 어떤 인간을 길러 내는지, 현재의 안온함이 미래의 가능성을 희생시키는지를 묻는다. 그의 관점을 온화한 자기 수용이나 보편적인 연민의 권고로 바꾸면 이러한 도전이 사라진다. 서문 제6절은 바로 연민의 도덕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그의 평가 기준 자체도 받아들일지 검토해야 하는 철학적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