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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Q272

삶과 세계에 최종 설명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가?

삶과 세계에 왜 무언가가 존재하는지, 의식과 도덕의 궁극적 근거가 무엇인지, 고통과 죽음이 어떤 전체 속에 놓이는지 묻다 보면 최종 설명을 원하게 된다. 하나의 일관된 답은 혼란을 줄이고 삶의 방향을 안정시키지만, 종교와 철학, 과학이 제시하는 설명의 범위와 방법은 서로 다르다. 모든 질문을 완전히 닫는 체계를 찾지 못하면 삶이 근거 없이 떠 있는 듯 느껴질 수 있다. 이 질문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인간이 이해를 필요로 하면서도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함께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설명에는 적용 범위와 근거가 있다. 과학적 설명은 관찰 가능한 과정과 규칙을 밝히고 예측을 가능하게 하지만 존재의 목적과 가치 판단을 같은 방법으로 모두 해결하지는 않는다. 철학과 종교는 존재와 의미, 목적을 더 넓게 해석하지만 경험적 검증과 전통의 권위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과 추론하는 것, 믿고 바라는 것을 구분하면 최종 답이 없다는 사실이 모든 지식의 무효를 뜻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모름을 인정하는 태도와 탐구를 포기하는 태도도 서로 다르다. 우주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모형이 발전해도 왜 존재가 있는지에 관한 형이상학적 질문은 남을 수 있다. 사랑의 생물학적 과정을 이해하면서 그 관계가 가진 개인적·윤리적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고, 의식의 신경학적 조건을 알아도 주관적 경험의 성격에 대한 논쟁은 계속된다. 죽음 이후를 확정하지 못한 사람도 임종의 가족을 돌보고 남은 관계를 정리한다. 부당한 고통의 궁극적 이유를 알지 못해도 피해를 줄이고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반대로 빈틈을 성급한 설명으로 채우면 검증되지 않은 주장과 권위에 의존할 위험이 있다. 최종 설명 없이 산다는 말은 모든 견해가 같다고 여기거나 일관된 세계관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근거의 차이를 구분하고 새로운 증거에 따라 입장을 수정하며 열린 질문을 견디는 태도를 뜻할 수 있다. 이 질문은 궁극적 답이 없어도 약속을 지키고 진실을 탐구하며 사랑할 이유를 세울 수 있는지 묻는다. 설명되지 않은 부분은 경이와 불안을 함께 남기며, 어느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규칙도 없다. 불확실성 속에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치와 책임을 실천하는 삶과 최종 설명을 계속 탐색하는 일은 함께 이어질 수 있다.

1. 데이비드 흄 — 궁극적 근거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이어지는 경험과 일상의 판단

데이비드 흄(1711~1776)은 인간의 믿음이 경험과 마음의 작용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 탐구한 스코틀랜드 철학자다.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에서는 인과적 추론과 회의주의를 검토하고,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논쟁을 통해 세계의 질서로부터 신의 성격을 어디까지 추론할 수 있는지 묻는다. 두 저작을 함께 읽으면 모든 믿음의 궁극적 토대를 증명하는 일과 실제로 판단하며 살아가는 일 사이의 간격이 드러난다.
삶의 최종 설명을 요구할 때에는 서로 다른 두 요구가 겹쳐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왜 세계가 존재하며 어떤 목적을 갖는지 밝히려는 요구다. 다른 하나는 내가 지금 경험을 신뢰하고 행동해도 되는지 보증받으려는 요구다. 흄은 세계의 최종 원인을 확정하지 못한다고 해서 일상의 판단이 모두 중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논증으로 모든 토대를 확보하기 전에 이미 먹고, 대화하고, 위험을 피하며, 다른 사람과 약속을 맺는다.
이것은 회의주의에 대한 간단한 논리적 반박이 아니다. 흄은 경험을 넘어 미래를 추론하는 우리의 습관에 철학적 문제가 남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자연적 성향과 활동은 그 의심이 삶 전체를 영구적으로 정지시키지 못하게 한다.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 제12절에서 문제 되는 것은 이 구별이다.

“모든 담론과 모든 행동은 즉시 멈추고, 사람들은 충족되지 못한 자연적 필요가 그 비참한 생존을 끝낼 때까지 완전한 무기력 속에 머물 것이다. 물론 그처럼 치명적인 일이 실제로 벌어질까 크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연은 언제나 원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피론주의자가 심오한 추론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잠시 놀라움과 혼란에 빠뜨릴 수는 있지만, 삶에서 맨 먼저 마주치는 사소한 사건만으로도 모든 의심과 망설임은 달아난다. 그러면 그는 행동과 사유의 모든 점에서 다른 학파의 철학자들이나 철학적 탐구에 한 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들과 같은 상태로 돌아간다.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향한 웃음에 동참하며, 자신의 모든 반론이 단지 지적인 유희였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 반론들이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의 기묘한 처지뿐이다. 인간은 행동하고 추론하고 믿어야 하지만, 아무리 성실히 탐구해도 이러한 활동의 근거에 관해 스스로 만족할 만한 해명을 얻거나 그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을 제거하지 못한다.”

David Hume,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XII, Part II, §23. [원문](https://davidhume.org/texts/e/12#E12.23)

“실제로 더 완화된 회의주의, 곧 아카데미아 철학이 있으며, 그것은 지속될 수도 있고 유익할 수도 있다. 이 회의주의는 피론주의 또는 과도한 회의주의의 무차별적인 의심이 상식과 성찰에 의해 어느 정도 교정될 때, 부분적으로 그 결과로 생겨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본성상 자신의 의견을 단정하고 독단적으로 주장하기 쉽다. 사물의 한쪽 면만 보고 반대편에서 균형을 이루는 논거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자신이 기울어지는 원칙 속으로 성급히 뛰어들며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지도 않는다. 망설이거나 저울질하는 일은 그들의 이해를 혼란스럽게 하고, 열정을 제어하며, 행동을 멈추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불편한 상태에서 벗어날 때까지 조급해하며, 주장을 아무리 강하게 하고 믿음을 아무리 완고하게 지켜도 그 상태에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여기지 못한다.”

David Hume,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XII, Part III, §24. [원문](https://davidhume.org/texts/e/12#E12.24)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자연신학 전체가 하나의 단순하지만 다소 모호하고, 적어도 규정되지 않은 명제, 곧 우주의 질서를 낳는 원인 또는 원인들이 아마 인간 지성과 어떤 먼 유사성을 지닌다는 명제로 귀결된다고 하자. 이 명제를 확대하거나 변형하거나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자.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추론도 제공하지 못하고, 어떤 행동이나 자제의 원천도 될 수 없다고 하자. 또한 불완전한 이 유사성이 인간의 지성보다 더 나아갈 수 없고, 개연성의 외관조차 갖추지 못한 채 정신의 다른 성질들로 옮겨 갈 수도 없다고 하자. 실제로 그렇다면 가장 탐구심이 강하고 사색적이며 종교적인 사람이라도, 이 명제가 떠오를 때마다 철학적으로 소박하게 동의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반론보다 우세하다고 믿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대상의 위대함에서 어느 정도의 놀라움이, 그 불명료함에서 어느 정도의 우울함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것이다. 그토록 비범하고 장대한 물음에 더 만족스러운 해답을 주지 못하는 인간 이성에 대한 얼마간의 경멸도 생겨날 것이다.”

David Hume,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XII, §33. [원문](https://davidhume.org/texts/d/12#D12.33)

이 대화는 필론 한 사람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필론은 뒤이어 계시와 그리스도교를 언급하고, 서술자 팜필로스는 클레안테스의 입장이 진리에 더 가깝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필론의 발언을 곧바로 흄 자신의 최종 신앙고백으로 읽을 수는 없다. 여기서 살펴보는 논점은 대화 안에서 제기되는 추론의 한계이며, 단순히 흄의 종교적 입장을 한 문장으로 확정하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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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마누엘 칸트 — 궁극적 지식의 한계 안에서 세우는 도덕적 의무와 이성적 희망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는지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분하여 이성의 능력과 한계를 탐구한 철학자다. *Kritik der reinen Vernunft* (순수이성비판)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경험을 넘어선 인식의 주장을 검토한다.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실천이성비판)은 도덕법칙이 어떻게 의지를 규정하며, 도덕적 실천이 자유·불멸·신에 대한 사유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논한다. 두 저작은 서로 다른 물음에 답하면서도 인간 이성의 이론적 사용과 실천적 사용을 연결한다.
삶의 최종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은 흔히 세계가 어떤 목적을 갖는지 먼저 알아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이 순서를 문제 삼는다. 세계 전체와 신을 하나의 경험적 대상처럼 알아야만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유한한 인간은 확보할 수 없는 지식을 기다리며 책임을 유예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원칙으로 행동해야 하는지를 묻는 일은 세계의 궁극적 원인을 설명하는 일과 구별된다.
이 구별은 모르는 것을 마음대로 믿어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다. 칸트가 신앙에 자리를 마련한다고 할 때 염두에 둔 것은 도덕적 실천과 연결되는 이성적 믿음이다. 그는 경험의 한계를 넘는 사변적 지식의 주장을 제한하면서도, 인간이 자유롭게 행동하며 최고선을 추구할 수 있다는 실천의 관점을 확보하려 한다. 다음 대목에서 비판의 대상은 지식 일반이 아니라 이성이 초감성적 대상을 이론적으로 파악했다고 주장하는 월권이다.

“순수이성의 비판적 원칙들이 갖는 이러한 적극적 유익은 신의 개념과 우리 영혼의 단순한 본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나, 간결함을 위해 여기서는 지나가겠다. 그러므로 나는 내 이성의 필수적인 실천적 사용을 위해 신과 자유와 불멸을 가정하는 일조차 할 수 없다. 사변이성이 경험을 넘어선 통찰을 갖는다는 주장을 동시에 거두어들이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변이성은 그러한 통찰에 도달하기 위해 실제로는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만 미치는 원칙들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원칙들을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에 적용하면, 그것을 언제나 현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순수이성의 모든 실천적 확장을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믿음에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지식을 지양해야 했다. 형이상학의 독단론, 곧 순수이성에 대한 비판 없이 형이상학에서 전진할 수 있다는 선입견은 도덕성과 충돌하는 모든 불신의 참된 원천이며, 그러한 불신은 언제나 매우 독단적이다.”

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Vorrede zur zweiten Auflage. [원문](https://www.biancahoegel.de/archiv/kant/kritik_der_reinen_vernunft/vorrede_zur_zweiten_auflage.html)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도덕적 필연성이 주관적인 것, 곧 필요이지, 객관적인 것, 곧 그 자체로 의무는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사물의 존재를 가정해야 한다는 의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이성의 이론적 사용에 관계한다. 또한 여기서 신의 존재를 모든 의무의 근거로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도 아니다. 충분히 입증되었듯이 그 근거는 오직 이성 자체의 자율성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무에 속하는 것은 세계 안에 최고선을 산출하고 증진하려는 노력뿐이다. 따라서 최고선의 가능성은 요청될 수 있지만, 우리 이성은 최고의 지성을 전제하는 경우에만 그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은 우리의 의무에 대한 의식과 연결된다. 이 가정은 이론이성에 속하는 한 설명 근거로서는 가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도덕법칙이 우리에게 과제로 부여한 대상인 최고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곧 실천적 목적에 따른 필요와 관련해서는 믿음, 그것도 순수한 이성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믿음이 생겨나는 원천은 이론적 사용과 실천적 사용 모두에서 오직 순수이성이기 때문이다.”

Immanuel Kant,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Erster Teil, Zweites Buch, Zweites Hauptstück, V. [원문 앞부분](https://korpora.org/kant/aa05/125.html) · [이어지는 원문](https://korpora.org/kant/aa05/126.html)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Immanuel Kant,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Erster Teil, Erstes Buch, Erstes Hauptstück, §7. [원문](https://korpora.org/kant/aa05/0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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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사실의 최종 설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의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언어가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과 그 한계를 탐구한 철학자다. 초기 저작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논리-철학 논고)에서는 명제가 가능한 사실을 나타내는 방식을 분석하고, 책의 끝부분에서 윤리·가치·삶의 의미를 다룬다. 1929년의 *A Lecture on Ethics* (윤리학에 관한 강의)는 일상적인 좋음과 절대적 가치의 차이를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여기서 검토하는 답은 이 두 텍스트에 나타난 문제의식에 한정된다.
“세계의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왜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의문을 제기한다. 질병이 생기는 원인이나 별이 형성되는 과정은 사실에 관한 설명이다. 그러나 세계 전체가 어떤 절대적 가치를 갖는지 묻는 말은 그와 같은 종류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을 아무리 많이 덧붙여도 삶 전체의 의미가 하나의 새로운 사실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세계는 사실들의 전체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서술은 다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을 남긴다. 비트겐슈타인이 절대적 가치를 이런 우연적인 사실들과 구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 밖”이라는 표현은 우주 저편에 가치라는 물체가 있다는 지리적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세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일이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그 안에는 가치가 없으며,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가치를 갖지 않을 것이다. 가치를 갖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건과 그렇게 있음의 바깥에 놓여 있어야 한다. 모든 사건과 그렇게 있음은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연적이지 않게 만드는 것은 세계 안에 놓여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다시 우연적일 것이다. 그것은 세계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Ludwig Wittgenstein,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6.41. [원문](https://www.gutenberg.org/files/5740/5740-pdf.pdf)

“신비로운 것은 세계가 어떻게 있는가가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세계를 한계 지어진 전체로 보는 것이다. 세계를 한계 지어진 전체로 느끼는 감정이 신비로운 것이다.”

Ludwig Wittgenstein,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6.44–6.45. [원문](https://www.gutenberg.org/files/5740/5740-pdf.pdf)

“우리는 가능한 모든 과학적 질문에 답이 주어져도 우리의 삶의 문제들은 아직 전혀 건드려지지 않았다고 느낀다. 물론 그때에는 더 이상 어떤 질문도 남지 않으며, 바로 이것이 답이다.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가 사라지는 데서 드러난다. 오랜 의심 끝에 삶의 의미가 분명해진 사람들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 아닌가.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로운 것이다.”

Ludwig Wittgenstein,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6.52–6.522. [원문](https://www.gutenberg.org/files/5740/5740-pdf.pdf)

“우리라는 새장의 벽에 부딪치려는 이러한 시도는 완전히, 절대적으로 가망이 없다. 삶의 궁극적 의미, 절대적 선, 절대적으로 가치 있는 것에 관해 무엇인가 말하려는 욕망에서 생겨나는 한, 윤리는 학문이 될 수 없다. 윤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지식에 무엇을 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정신의 한 경향을 보여 주는 기록이며, 나는 개인적으로 그 경향을 깊이 존중하지 않을 수 없고, 결코 그것을 조롱하지 않을 것이다.”

Ludwig Wittgenstein, *A Lecture on Ethics*, 마지막 문단. [원문](https://www.wittgensteinproject.org/w/index.php/Lecture_on_Eth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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