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좋은 것과 그 자체로 옳은 것이 충돌하면 무엇을 택할까?
나에게 좋은 것은 행복, 안전, 건강, 이익, 가까운 관계의 보호처럼 개인의 삶을 낫게 만드는 것을 뜻할 수 있다. 그 자체로 옳은 것은 개인의 이익과 무관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무, 공정성, 타인의 권리, 진실과 공동선을 가리킬 수 있다. 두 방향이 일치할 때에는 문제가 잘 보이지 않지만, 정직하면 손해를 보고 가까운 사람을 돕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불공정한 결과를 만들 때 갈등이 드러난다. 자기 삶에 대한 책임과 보편적 도덕 요구가 왜 충돌하며 어느 범위까지 서로를 제한하는지가 질문이 된다. 사례는 일상과 제도에 걸쳐 있다. 내부고발자는 진실과 공익을 위해 직업과 관계의 위험을 감수할 수 있고, 직원은 조직의 규칙을 따르는 일이 가족의 생계를 지키면서 고객에게 해를 줄 가능성을 마주할 수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일은 가족에 대한 책임이면서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특혜의 문제와 연결된다. 의료인은 자신의 안전과 환자 돌봄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고, 시민은 세금과 환경 규제를 개인의 비용과 공동의 이익 사이에서 경험한다. 친구의 비밀을 지키는 충성과 피해를 막기 위한 공개도 서로 다른 도덕적 요구를 제시한다. “그 자체로 옳다”는 판단도 하나의 기준으로 합의되지 않는다. 결과를 최대한 좋게 만드는 것, 모든 사람의 권리와 규칙을 지키는 것, 관계에서 맡은 책임을 충실히 하는 것, 좋은 성품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결론을 낼 수 있다. 개인의 행복을 도덕에서 완전히 제외하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 요구될 수 있고, 자기 이익을 항상 우선하면 공동의 규칙과 타인의 신뢰가 약해진다. 또한 나에게 좋은 것이 장기적으로 공동체에도 도움이 될 수 있고, 옳다고 믿은 선택이 예상하지 못한 피해를 만들 수도 있다. 이 질문은 자기 이익과 도덕 가운데 한쪽을 늘 선택하라는 규칙을 묻지 않는다. 나에게 좋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옳음의 근거를 어떤 도덕적 관점에서 찾는지, 영향을 받는 사람과 결과의 시간 범위, 자신이 맡은 관계적 책임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물음이다. 개인과 공동체, 특별한 관계와 보편적 원칙, 의도와 결과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 선택의 의미가 형성된다. 충돌 자체의 구조를 정확히 보는 것이 질문의 출발점이다.
1. 임마누엘 칸트 - 이익보다 우선하는 인간 존중의 원칙
칸트는 결과가 나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거짓 약속이나 타인 이용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본다. 옳음은 욕구와 별개로 모든 합리적 존재에게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을 요구한다.
####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도덕형이상학 정초)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는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 역시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하며, 나와 타인의 인간성을 동시에 존중하는 선택인지 검토해야 한다.
저작과 위치: 임마누엘 칸트, 『도덕형이상학 정초』, 제1–2절, 선의지·정언명령·인간성 정식.
#### 중심 생각
자기희생을 무조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 나와 타인의 인간성을 동시에 존중하는 선택인지 검토한다.
원전 번역:
성향은 그 자체가 결핍의 근원이므로, 그 성향들을 위해 그것 자체가 바람직해야 할 절대적 가치를 지니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이성적 존재는 그것들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보편적으로 바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어떤 대상의 가치는 언제나 조건적이다.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에 의해 존재하는 존재자들 가운데 이성이 없는 것은 수단으로서의 상대적 가치만을 가지며, 그래서 사물이라고 불린다. 반대로 이성적 존재자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 본성이 이미 그들을 그 자체로 목적, 곧 단지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으로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성적 존재자의 존재는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를 제한하며 존중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가 행위를 통해 생겨나게 하는 효과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가치 있는 주관적 목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 목적이다. 즉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이며, 그 자리에 다른 목적을 놓아 그것을 단지 수단으로 삼을 수 없는 존재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디에도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가치가 조건적이고 우연적이기만 하다면 이성의 최고 실천 원리도 전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고 실천 원리, 즉 인간의 의지에 대한 정언명령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목적이 되는 것, 곧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개념에서 나와 의지의 객관적 원리를 이루어야 하며, 따라서 보편적인 실천 법칙으로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원리의 토대는 이렇다. 이성적 본성은 그 자체로 목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생각한다. 그런 한에서 이것은 인간 행위의 주관적 원리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자도 나에게 적용되는 바로 그 이성적 근거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것은 동시에 객관적 원리이며, 최고 실천 법칙으로서 의지의 모든 법칙이 여기에서 도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실천적 명령은 다음과 같다. 너 자신의 인격에서든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든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않도록 행위하라.
Immanuel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Section II, Ak. 4:428–429.
2. 크리슈나 - 결과의 집착을 내려놓는 의무의 수행
『바가바드 기타』는 좋은 결과에 집착하거나 갈등을 피하기 위해 무행위로 숨는 태도를 모두 경계한다. 아르주나에게 필요한 것은 욕망과 두려움에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책임을 분별하는 일이다.
#### *Bhagavad Gītā*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에서 자기 의무는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구실이 아니다. 행위의 동기와 공동의 질서, 예상되는 피해, 자신이 감당할 책임을 함께 살핀다.
저작과 위치: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3·6·18장, 행위·평정·자기 의무.
#### 중심 생각
자기 의무는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구실이 아니다. 행위의 동기, 공동의 질서, 피해, 감당할 책임을 함께 살핀다.
원전 번역:
너에게 권리가 있는 것은 오직 행위에 대해서이며, 그 행위의 열매에 대해서는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행위의 열매가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말고, 무행위에도 집착하지 말라. 오 다난자야여, 집착을 버리고 요가에 굳게 서서 행위를 수행하라. 성공과 실패를 똑같이 여기라. 이러한 평정이 요가라고 불린다. 결과를 얻으려는 행위는 지혜의 요가보다 훨씬 낮다. 오 다난자야여, 분별의 지혜에 귀의하라. 열매를 위해 행위하는 사람들은 가련하다. 지혜에 결합된 사람은 이 삶에서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모두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요가에 힘써라. 요가는 행위의 능숙함이다.
*Bhagavad Gītā* 2.47–50.
3. 아리스토텔레스 - 개인의 선과 옳음을 함께 형성하는 품성
#### *Ēthika Nikomacheia*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판단을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외부에서 명령되는 옳음의 충돌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좋은 삶은 순간적인 욕망의 충족이나 소유의 증가보다 이성에 따라 훌륭하게 활동하는 삶이며, 정의·절제·용기 같은 덕은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성품이다. 올바른 선택을 반복하여 성품이 형성되면 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과 공동체에서 옳은 일이 서로 전혀 관계없는 목표로 남지 않는다. 정의로운 행동은 때로 당장의 이익을 줄이지만, 정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활동 자체가 인간의 번영을 이룬다.
저작과 위치: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의 행복과 인간의 기능, 제2권의 품성적 덕, 제6권의 실천적 지혜에 관한 논의.
#### 중심 생각
‘나에게 좋은 것’에는 서로 다른 층위가 있다. 돈과 편안함, 승진, 위험 회피처럼 당장 원하는 이익이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 살 것인지에 관한 장기적인 선이 있다. 옳은 일을 선택하면서 단기적 손해를 입더라도 신뢰와 자기 존중, 정의로운 관계를 지킬 수 있다. 반대로 규칙을 지켰다는 사실만 남고 구체적인 사람의 삶이 심하게 훼손된다면 그 규칙의 적용이 실천적 지혜를 갖추었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는 일반 원칙을 버리는 임기응변이 아니다. 어떤 특징이 현재 상황에서 중요한지 판단하고, 목적과 수단, 감정과 행동을 적절히 연결하는 능력이다. 같은 정직의 덕도 사소한 정보를 무조건 공개하는 행동과 타인을 속이지 않으면서 사생활을 보호하는 행동 사이에서 맥락을 살펴야 한다. 좋은 성품은 개인적 이익만 좇지 않게 하면서도 추상적 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게 한다.
원전 번역:
그러므로 이성적 원리를 지닌 부분의 활동하는 삶이 남는다. 그 한 부분은 이성적 원리에 복종한다는 의미에서 그 원리를 가지며, 다른 부분은 이성적 원리를 소유하고 사유를 실행한다는 의미에서 그 원리를 가진다. 또한 이성적 부분의 삶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으므로, 여기서 뜻하는 것은 활동의 의미에서의 삶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이 더 본래적인 의미의 삶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능이 이성적 원리를 따르거나 포함하는 영혼의 활동이라면, 그리고 어떤 사람과 그 일을 훌륭하게 하는 사람의 기능이 종류상 같다고 말한다면, 예를 들어 수금을 타는 사람과 훌륭한 수금 연주자의 기능이 같고 모든 경우에 그 기능에 탁월함이 덧붙여진다면, 수금 연주자의 기능은 수금을 연주하는 것이고 훌륭한 연주자의 기능은 그것을 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능을 어떤 종류의 삶, 곧 이성적 원리를 포함하는 영혼의 활동이나 행위라고 하고, 훌륭한 인간의 기능을 그것들을 좋고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며, 각 행위가 그에 적합한 탁월성에 따라 수행될 때 잘 수행된다고 한다면, 인간의 선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으로 드러난다. 덕이 여럿이라면 가장 훌륭하고 완전한 덕에 따른 활동이다. 그러나 완전한 삶 전체에서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한 마리 제비가 여름을 만들지 않고 하루가 여름을 만들지 않듯이, 하루나 짧은 시간만으로 사람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I.7, 1098a3–20; W. D. Ross 영어 번역 대조.
4. 존 스튜어트 밀 - 모든 당사자의 행복을 함께 계산하는 결과
#### *Utilitarianism* (공리주의)
밀은 행위의 옳음을 행위자가 따르는 의무의 명칭보다 그 행위가 관련된 사람들의 행복과 고통에 미치는 결과를 통해 판단한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행복은 행동하는 개인의 행복만이 아니라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의 행복이다. 개인에게 유리한 선택이 여러 사람에게 큰 피해를 만든다면 사적인 이익은 옳음을 결정하는 최종 기준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일반 규칙을 지키는 일이 실제 상황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크게 만든다면 규칙이 존재하는 목적과 결과를 검토해야 한다.
저작과 위치: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 제2장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 중심 생각
결과를 본다는 것은 눈앞의 이익만 합산하는 일이 아니다. 단기와 장기, 직접적 영향과 간접적 영향, 소수에게 집중되는 심각한 피해와 다수에게 넓게 퍼지는 작은 편익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약속을 지키고 권리를 보호하는 규칙은 대체로 신뢰와 안전을 낳기 때문에 큰 효용을 가진다. 매번 자신의 편익에 따라 예외를 만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공리주의적 판단에서도 규칙과 권리는 결과를 안정적으로 보호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밀은 쾌락의 양만이 아니라 질적 차이도 논한다. 배움과 우정, 존엄과 자율성처럼 인간의 고등 능력을 사용하는 행복은 단순한 자극의 반복과 같은 방식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따라서 “나에게 좋다”는 말이 순간의 만족인지, 장기적인 능력과 관계를 살리는 행복인지 구분해야 한다. 또 자신의 이익을 타인의 같은 크기의 이익보다 특별히 크게 계산하지 않는 공평성이 필요하다.
원전 번역:
나는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좀처럼 공정하게 인정하지 않는 점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행위의 옳음을 판단하는 공리주의적 기준이 되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의 행복이다.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 사이에서 공리주의는 행위자에게 이해관계가 없고 자비로운 관찰자처럼 엄격하게 공평할 것을 요구한다. 나사렛 예수의 황금률에서 우리는 공리주의 윤리의 온전한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이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공리주의적 도덕의 이상적 완성을 이룬다. 이 이상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 공리는 첫째, 법과 사회 제도가 각 개인의 행복 또는 실천적으로 말해 이익을 가능한 한 전체의 이익과 조화시키도록 요구한다. 둘째, 인간 성품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교육과 여론의 힘을 사용하여 모든 개인의 마음속에 자기 자신의 행복과 전체의 선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연관, 특히 자기 행복과 보편적 행복에 대한 고려가 요구하는 소극적·적극적 행동 방식의 실천 사이의 연관을 세우도록 요구한다. 그리하여 전체의 선과 어긋나는 행동이 자기 행복을 얻는 가능한 방식으로 생각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전체의 선을 증진하려는 직접적인 충동이 각 개인의 습관적인 행동 동기 가운데 하나가 되고, 그것과 연결된 감정이 모든 인간의 감정적 삶에서 크고 두드러진 부분을 차지하게 한다.
John Stuart Mill, *Utilitarianism*, 제2장, “I must again repeat”로 시작하는 문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