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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Q056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앎과 증거로 확인할 수 있는 앎을 어떻게 함께 다룰까?

사람이 아는 것 중에는 말과 명제로 설명하기 어려운 앎이 있다. 자전거의 균형을 잡는 법, 숙련된 장인이 재료의 상태를 느끼는 감각, 간호사가 환자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는 직관, 음악가가 박자와 분위기를 맞추는 능력은 실제 행동에서 드러나지만 완전한 규칙으로 옮기기 어렵다. 반면 공적인 판단과 지식은 다른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증거와 설명을 요구한다. 개인적·몸의 앎과 공유 가능한 검증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가 질문이 된다.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앎은 여러 영역에서 나타난다. 오랜 관계 속에서 상대의 표정만 보고 상태를 짐작하는 경험, 낯선 장소에서 위험을 감지하는 몸의 느낌, 예술가의 구성 감각, 종교적·명상적 체험이 있다. 전통 농업과 생태 지식은 세대에 걸친 관찰과 실천에 담겨 있으나 실험실의 변수로 옮기기 어려울 수 있다. 의료와 소방, 항공 같은 전문 현장에서는 숙련된 직관이 빠른 판단을 돕지만, 직관의 근거가 설명되지 않으면 편견과 오류를 구분하기 어렵다. 개인이 느끼는 통증과 감정은 당사자에게 직접 주어진 앎이지만 타인은 측정과 증언을 통해서만 접근한다. 증거로 확인할 수 있는 앎도 단순하지 않다. 측정 도구와 범주, 연구 설계는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정하고,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 경험을 주변으로 밀어낼 수 있다. 반대로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주장이 비판과 검증에서 면제되면 권위와 사기가 숨을 수 있다. 숙련자의 직관은 반복된 경험을 압축한 판단일 수 있고, 사회적 고정관념을 무의식적으로 재생한 반응일 수도 있다. 개인에게 분명한 체험이 다른 사람에게 같은 의미를 갖지 않을 때, 공유와 공적 결정의 기준이 문제가 된다. 이 질문은 두 종류의 앎 중 하나를 지식으로 선택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어떻게 행동과 판단에서 드러나는지, 어떤 경험과 훈련이 그 앎을 만들었는지, 다른 사람이 검토할 수 있는 흔적과 한계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물음이다. 증거는 개인의 경험을 지우지 않으면서 공통의 판단을 가능하게 하고, 체험과 숙련은 공식적인 측정이 놓친 대상을 보게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앎이 만날 때 발생하는 번역과 신뢰의 문제가 핵심이다.

1. 윌리엄 제임스 - 종교적 경험의 권위와 한계

제임스는 신비 경험이 당사자에게 앎처럼 주어질 수 있다고 보면서도 그 권위가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동으로 이전되지는 않는다고 구별했다. 개인적 확신과 공적 사실 주장을 분리한다.
####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A Study in Human Nature*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체험이 삶을 바꾸는 통찰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체험에서 원인과 세계에 관한 주장을 이끌어 낼 때에는 경험의 열매, 다른 설명, 반복 가능성,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를 검토해야 한다.
저작과 위치: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강의 I, XVI–XVII, XX: 경험의 기원·가치와 신비 경험.
#### 중심 생각
체험은 삶을 바꾸는 통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원인과 세계에 관한 주장을 만들 때에는 경험의 열매, 다른 설명, 반복 가능성,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를 검토해야 한다.
원전 번역:

말로 표현할 수 없음. 내가 어떤 정신 상태를 신비적이라고 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가장 손쉬운 표지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 경험의 당사자는 곧바로 그것이 표현을 거부하며, 그 내용을 적절하게 말로 보고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 경험의 성질은 직접 겪어 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되거나 이전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신비적 상태는 지성의 상태보다 감정의 상태에 더 가깝다. 어떤 감정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사람에게 그 감정의 성질이나 가치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교향곡의 가치를 알려면 음악을 들을 귀가 있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자신도 사랑해 보아야 한다. 그런 마음이나 귀가 없으면 우리는 음악가나 연인을 공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를 정신이 약하거나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쉽다. 신비주의자는 우리 대부분이 자신의 경험을 바로 이처럼 부적절하게 다룬다고 느낀다. 지성적 성격. 신비적 상태는 감정의 상태와 매우 비슷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동시에 지식의 상태처럼 보인다. 그것은 담론적 지성이 헤아리지 못한 진리의 깊이에 대한 통찰의 상태이다. 그것은 조명이며 계시이고, 말로 충분히 표현되지 않더라도 의미와 중요성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대체로 이후의 삶에도 이상할 만큼 강한 권위를 남긴다.

William James,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1902), Lectures XVI–XVII, “Mysticism,” the first two marks of mystical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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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자 - 언어의 한계와 살아 있는 앎

장자는 이름과 시비가 특정 관점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언어가 세계 전체를 고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동시에 포정의 기술처럼 현실의 결을 세밀하게 따르는 앎을 보여 준다.
#### 《莊子(장자)》
『장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숙련과 직관이 반복된 실천에서 생길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를 신비화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 정확했고 언제 틀렸는지 행동과 결과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저작과 위치: 장자, 『장자』, 「소요유」·「제물론」·「양생주」.
#### 중심 생각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숙련과 직관은 반복된 실천에서 생길 수 있다. 그것을 신비화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 정확했고 언제 틀렸는지 행동과 결과를 통해 확인한다.
원전 번역: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손이 닿고 어깨가 기대며 발이 딛고 무릎이 버티는 곳마다, 살과 뼈가 갈라지는 소리와 칼이 움직이는 소리가 모두 음률에 맞았다. 그 움직임은 「상림」의 춤과 어울렸고, 「경수」의 장단에도 맞았다. 문혜군이 말했다.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이며, 기술보다 앞선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기 시작했을 때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더 이상 소 전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눈으로 보지 않고 정신으로 만납니다. 감각의 앎은 멈추고 정신의 움직임이 나아갑니다. 자연스러운 결을 따라 큰 틈을 가르고 큰 빈 곳으로 칼을 이끌며, 본래 그러한 구조를 따릅니다. 힘줄과 뼈가 얽힌 작은 곳조차 칼로 건드리지 않는데 하물며 큰 뼈이겠습니까. 좋은 백정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자르기 때문이고, 보통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찍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고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숫돌에서 막 갈아 낸 것과 같습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으면 넉넉하고 넓어서 칼날을 놀릴 자리가 반드시 남습니다. 그래서 십구 년이 지나도 칼날이 새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힘든 곳을 만날 때마다 저는 그 어려움을 알아보고 경계합니다. 시선을 멈추고 움직임을 늦추며 칼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 어느새 소가 풀려 흙덩이처럼 땅에 떨어집니다. 저는 칼을 든 채 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만족한 뒤, 칼을 닦아 잘 보관합니다.”

《莊子》內篇〈養生主〉, 「庖丁解牛」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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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이클 폴라니 -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암묵적 앎

#### *The Tacit Dimension* (암묵적 차원)
폴라니는 인간의 앎이 명시적인 문장과 규칙으로 모두 환원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사람은 수많은 얼굴 가운데 아는 사람을 알아보지만, 그 얼굴을 알아보게 한 모든 특징을 빠짐없이 설명하지 못한다. 자전거를 타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환자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거나, 문장의 어색함을 알아차리는 능력도 규칙 목록만으로 완전히 전달하기 어렵다. 그는 부분적인 단서들을 하나의 의미 있는 전체로 통합하는 과정에 암묵적 앎이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앎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앎의 일부가 몸의 숙련·주의·경험 속에서 작동한다는 뜻이다.
저작과 위치: 마이클 폴라니, 《암묵적 차원》 제1장 ‘암묵적 앎’.
#### 중심 생각
증거로 확인할 수 있는 앎은 다른 사람이 자료와 절차를 살피고 반박하거나 재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암묵적 앎은 실제 경험 속에서 무엇이 중요한 단서인지 알아보고, 여러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며, 명시적 규칙을 적용할 상황을 판별하게 한다. 과학 연구도 측정값과 공식만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좋은 문제를 알아보는 감각, 실험 장비를 다루는 손의 숙련, 예상 밖의 결과가 오류인지 발견의 단서인지 판단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명시적 지식과 암묵적 앎은 서로 배제되는 두 세계보다 실제 인식 안에서 함께 작동하는 층위에 가깝다.
그러나 설명하기 어렵다는 말이 모든 직감에 권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익숙함에서 생긴 판단에는 편견과 잘못된 습관도 섞일 수 있다. 숙련자의 감각이 신뢰를 얻으려면 반복된 경험, 결과에 대한 피드백, 다른 숙련자와의 비교, 실패를 통해 교정된 이력이 필요하다. 암묵적 앎을 존중한다는 것은 검증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검증 과정 자체에도 말로 다 적기 어려운 판단 능력이 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원전 번역: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앎을 다시 검토하고자 한다.

Michael Polanyi, *The Tacit Dimension* (1966), Chapter 1, “Tacit Knowing.”

폴라니는 얼굴 알아보기 같은 사례를 통해, 사람이 어떤 전체를 알아볼 때 그 판단을 가능하게 한 모든 세부 단서를 명시적으로 열거하지 못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암묵적 앎은 단순한 비합리적 직감이 아니라 부분적 단서들을 하나의 의미 있는 전체로 통합하는 능력이며, 명시적으로 말할 수 있는 지식도 이러한 배경적·숙련된 참여에 기대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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