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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Q054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남아 있어도 어떤 믿음을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합리적인 믿음이라고 하면 충분한 증거를 갖고 논리적으로 판단한 믿음을 떠올리지만, 일상과 학문에서 불확실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은 내일 비가 올지, 치료가 효과가 있을지, 상대가 약속을 지킬지, 과학 이론이 앞으로도 유지될지 완전한 확신 없이 판단한다.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모든 믿음을 보류하면 행동과 계획이 불가능해지고, 작은 근거만으로 확정하면 오류가 커질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증거와 불확실성이 합리성을 이루는지가 질문이 된다. 필요한 근거의 수준은 믿음의 내용과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 우산을 챙길지 결정할 때와 사람에게 범죄 책임을 물을 때 같은 확실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의료 선택에서는 연구의 평균적 효과와 개인의 상태, 부작용, 대안의 위험이 함께 들어간다. 과학에서는 반복 가능한 관찰과 이론의 설명력이 중요하고, 역사에서는 남아 있는 문서와 증언을 비교한다. 가까운 사람을 신뢰하는 판단은 통계보다 관계의 기록에 의존하며, 종교와 형이상학의 믿음은 관찰 증거와 체험, 전통, 철학적 논증을 서로 다르게 사용한다. 영역마다 증거의 형태와 검증 방식이 다르다. 합리성은 믿음의 내용만큼 확신의 정도와도 관련된다. 제한된 증거로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태도와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는 같은 믿음도 다르게 만든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때 수정할 수 있는지, 반대되는 자료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자신의 이해관계가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는지도 관련된다. 그러나 믿음을 계속 수정할 수 있다는 개방성이 실제로는 아무 입장도 책임지지 않는 태도로 사용될 수 있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는 잠정적 믿음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론적 확신과 실천적 결정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 이 질문은 모든 불확실성을 수치로 계산하는 방법을 찾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무엇을 믿고 있는지, 어떤 근거가 그 믿음을 지지하는지, 틀렸을 때의 비용과 수정 가능성, 믿음의 강도가 증거와 어울리는지를 이해하려는 물음이다. 합리적 믿음은 불확실성의 부재보다 불확실성을 어떻게 표시하고 다루는지와 관련될 수 있다. 알 수 없는 부분을 남긴 채 믿고 행동해야 하는 인간의 조건이 이 질문을 지속시킨다.

1. 존 로크 - 증거에 비례하는 믿음의 정도

로크는 지식과 개연적 판단을 구별하면서, 일상에서는 확실성이 아니라 증거의 비율에 맞춘 동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합리성은 의심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확신의 정도를 정확히 표시하는 태도다.
####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인간오성론)
존 로크의 『인간오성론』은 경험의 반복, 독립된 증언, 증인의 능력과 이해관계, 반대 사례를 비교하면 믿음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수정할 조건도 미리 정한다.
저작과 위치: 존 로크, 『인간오성론』, 제4권 14–16장, 판단과 개연성·동의의 정도.
#### 중심 생각
경험의 반복, 독립된 증언, 증인의 능력과 이해관계, 반대 사례를 비교하면 믿음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수정할 조건도 미리 정한다.
원전 번역:

우리가 앞 장에서 살펴본 개연성의 근거들은 우리의 동의가 세워지는 토대인 동시에, 그 동의의 여러 정도가 실제로 조절되거나 조절되어야 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다만 어떤 개연성의 근거가 존재하더라도, 진리를 찾고 올바르게 판단하려는 정신에 그것이 작용하는 정도는 그 근거가 정신에 실제로 드러나는 정도를 넘지 못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적어도 정신이 처음 판단하거나 탐구할 때에는 그러하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굳게 붙들고 있는 의견의 경우, 그 동의가 언제나 처음 그들을 설득했던 이유들을 지금 실제로 다시 보고 있는 데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많은 경우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주 훌륭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에게조차, 충분한 검토 끝에 그 문제의 한쪽을 받아들이게 했던 모든 증거를 보존하는 일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신중하고 공정하게 문제를 한 번 걸러 보고, 그 문제에 빛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구체적 사정을 살펴보며, 자신의 최선의 능력을 다해 전체 증거를 저울질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하고 정확하게 탐구한 뒤 개연성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발견하면, 그 결론을 자신이 발견한 진리로 기억 속에 보관하고, 이후에는 기억의 증언에 의지하여 ‘내가 한때 보았던 증거에 따르면 이 의견은 내가 지금 부여하는 만큼의 동의를 받을 만하다’고 만족하게 된다.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Book IV, Chapter XVI,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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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윌리엄 제임스 - 결정할 수 없는 순간의 실천적 결단

제임스는 모든 불확실한 믿음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증거가 원리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기다림 자체가 기회를 잃는 선택이 되는 살아 있고 강제되며 중대한 경우에 한해 결단의 역할을 인정한다.
#### *The Will to Believe* (믿고자 하는 의지)
윌리엄 제임스의 『믿고자 하는 의지』는 과학적 사실처럼 더 조사할 수 있는 문제에서는 증거를 기다려야 한다고 본다. 반면 신뢰와 관계처럼 먼저 참여해야 사실이 생기는 선택에서는 판단 유보가 중립이 아닐 수 있다.
저작과 위치: 윌리엄 제임스, 『믿고자 하는 의지』, 「믿고자 하는 의지」, 살아 있고 강제되며 중대한 선택.
#### 중심 생각
과학적 사실처럼 더 조사할 수 있는 문제에서는 증거를 기다려야 한다. 신뢰와 관계처럼 먼저 참여해야 사실이 생기는 선택에서는 유보가 중립이 아닐 수 있다.
원전 번역:

다음으로, 두 가설 사이에서 내리는 결정을 ‘선택’이라고 부르자. 선택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살아 있거나 죽어 있을 수 있고, 둘째 강제되거나 피할 수 있을 수 있으며, 셋째 중대하거나 사소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을 위해, 강제되고 살아 있으며 중대한 종류의 선택을 ‘진정한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살아 있는 선택은 두 가설이 모두 살아 있는 경우이다. 내가 그대에게 ‘신지학자가 되거나 이슬람교도가 되라’고 말한다면, 그대에게는 두 가설 모두 살아 있을 가능성이 낮으므로 아마 죽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불가지론자가 되거나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한다면 사정이 다르다. 그대가 받은 교육을 고려할 때 두 가설 모두, 아무리 작더라도, 그대의 믿음에 어느 정도 호소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내가 그대에게 ‘우산을 들고 나갈지, 들지 않고 나갈지 선택하라’고 말한다면 진정한 선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강제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예 밖에 나가지 않음으로써 쉽게 그 선택을 피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라’, ‘내 이론을 참이라고 하거나 거짓이라고 하라’고 말할 때도 그 선택은 피할 수 있다. 그대는 나에게 무관심한 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을 수 있고, 내 이론에 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그것 없이 지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대에게 강제된 선택을 제시하는 셈이다. 그 대안 밖에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없는 완전한 논리적 양자택일에 근거한 모든 딜레마는 이러한 강제된 종류의 선택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난센 박사이고 그대에게 북극 탐험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고 하자. 이 선택은 중대할 것이다. 아마 그와 같은 기회는 그대에게 단 한 번뿐일 것이고, 지금 내리는 선택은 북극 탐험가로서의 불멸성을 완전히 잃게 하거나 적어도 그 가능성을 손에 쥐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기회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람만큼이나 확실하게 그 보상을 잃는다. 반대로 기회가 유일하지 않고, 걸린 것이 하찮거나, 나중에 현명하지 못한 결정으로 드러났을 때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선택은 사소하다. 과학 생활에는 이런 사소한 선택이 많다. 화학자는 어떤 가설을 충분히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 1년 동안 검증에 매달릴 수 있다. 그는 그 정도로 그 가설을 믿는다. 그러나 실험 결과가 어느 쪽으로도 결론 나지 않는다면 그는 시간 손실만 감수하면 되고, 중대한 삶의 손해를 입지는 않는다.

William James, *The Will to Believe*, §I, *The Will to Believe and Other Essays in Popular Philosophy* (1897), pp.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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