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이 강하다는 사실은 믿음이 참이라는 근거가 되는가?
확신은 어떤 생각이 의심하기 어렵고 분명하게 참처럼 느껴지는 주관적 상태다. 기억, 직관, 종교적 체험, 논리적 이해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강한 확신을 만든다. 그러나 서로 모순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각자 같은 정도의 확신을 경험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 확신했던 판단이 틀렸음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확신은 믿는 사람의 심리 상태를 알려 주는지, 믿음의 진실성을 알려 주는지,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가 질문이 된다. 확신의 근거는 영역마다 다르다. 수학적 증명의 결론은 단계가 이해될 때 필연적으로 느껴질 수 있고, 어린 시절의 기억은 생생함 때문에 사실로 확신되지만 다른 기록과 어긋날 수 있다. 종교적 계시와 신비 체험은 당사자의 삶을 바꿀 만큼 분명하게 느껴져도 다른 전통에서는 다르게 해석된다. 정치적 믿음은 집단의 역사와 반복되는 정보 속에서 의심할 수 없는 상식이 되며, 가까운 사람의 의도에 대한 확신은 오랜 관계와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 몸의 감각과 직업적 숙련에서 오는 직관은 빠르고 정확할 수 있지만 환경이 바뀌면 잘못 작동할 수도 있다. 확신이 강해지는 과정에는 증거 외의 요소도 참여한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는 것, 믿음을 공유하는 집단에 속하는 것, 두려움과 희망, 자신의 정체성과 이해관계가 확신을 강화할 수 있다. 반대로 충분한 근거가 있어도 불안과 낮은 자기신뢰 때문에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새로운 발견은 처음에는 소수의 강한 확신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근거 없는 확신이 권력과 결합해 타인을 억압하기도 한다. 확신의 정도와 증거의 질, 믿음이 참일 가능성, 행동에 옮길 정당성은 서로 다른 축이다. 이 질문은 확신을 의심하고 약한 믿음만 유지하라는 결론을 전제하지 않는다. 무엇이 확신을 만들었는지, 그 믿음이 틀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근거와 개인에게만 주어진 경험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이해하려는 물음이다. 확신은 행동과 헌신을 가능하게 하지만 참과 거짓을 스스로 결정하는 표시는 아니다. 주관적 분명함과 세계에 대한 판단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이 질문의 중심이다.
1. 찰스 샌더스 피어스 - 확신의 강도와 탐구 방법의 구별
확신은 마음이 의심에서 벗어나 안정된 상태를 보여 주지만, 그 안정이 세계와 일치한다는 사실까지 증명하지 않는다. 믿음이 반대 증거와 공동의 검증을 견디는지 살펴야 한다.
#### *The Fixation of Belief* (믿음의 고정)
피어스는 「믿음의 고정」에서 끈기·권위·선험적 취향도 강한 믿음을 만들 수 있다고 분석한다. 참에 접근하려면 개인의 만족이 아니라 경험과 공개된 탐구가 믿음을 교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작과 위치: 찰스 샌더스 피어스, 「믿음의 고정」, 제2–5절, 의심·믿음과 탐구 방법에 관한 논의.
#### 중심 생각
피어스는 끈기·권위·선험적 취향도 강한 믿음을 만들 수 있다고 분석한다. 참에 접근하려면 개인의 만족이 아니라 경험과 공개된 탐구가 믿음을 교정할 수 있어야 한다.
원전 번역:
의심의 자극은 믿음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투쟁을 일으킨다. 나는 이 투쟁을 ‘탐구’라고 부르겠다. 비록 이 말이 때로는 아주 적절한 명칭이 아님을 인정해야 하지만 말이다. 의심의 자극은 믿음을 얻으려는 투쟁의 유일한 직접적 동기이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키도록 우리의 행동을 참되게 이끌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런 성찰은 그러한 결과를 보장하도록 형성되지 않은 듯한 모든 믿음을 거부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믿음 대신 의심을 만들어 냄으로써만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의심과 함께 투쟁이 시작되고, 의심이 멎으면서 끝난다. 따라서 탐구의 유일한 목적은 의견을 정착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단지 어떤 의견이 아니라 참된 의견을 찾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을 시험해 보면 근거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확고한 믿음에 도달하자마자, 그 믿음이 참이든 거짓이든 우리는 완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지식 영역 바깥에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정신적 노력의 동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최대치는, 우리가 참이라고 생각하게 될 믿음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각각의 믿음을 참이라고 생각하며,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Charles S. Peirce, *The Fixation of Belief*, §IV, *Popular Science Monthly* 12 (1877).
그러므로 우리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인간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영속적인 것, 곧 우리의 생각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어떤 것에 의해 결정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위로부터 오는 개인적인 영감에서 그런 방법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공적인 것으로 보는 생각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끈기의 방법의 한 형태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 외부의 영속적인 것은 그 영향이 한 개인에게만 한정된다면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영향은 개인의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 방법은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같은 결론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과학의 방법이다. 그 근본 가설을 좀 더 익숙한 말로 다시 표현하면 이렇다. 우리의 의견과 전적으로 독립된 성질을 가진 실재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 실재들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우리의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은 대상과 맺는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르더라도, 지각의 법칙을 이용하면 추론을 통해 사물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알아낼 수 있다. 충분한 경험을 하고 충분히 추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참된 결론으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Charles S. Peirce, *The Fixation of Belief*, §V, *Popular Science Monthly* 12 (1877).
2. 소크라테스 - 무지를 자각하는 철학적 검토
소크라테스의 무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회의가 아니라,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여기는 상태를 경계하는 태도다. 확신은 검토를 끝낼 이유가 아니라 삶의 근거를 다시 묻는 출발점이 된다.
#### *Apology*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소크라테스는 다수의 동의와 자신의 생존보다 논박 가능한 이유와 정의로운 삶을 우선했다. 확신을 인격과 동일시하지 않을 때 질문과 반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저작과 위치: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변명』, 20c–23b, 28a–38a.
#### 중심 생각
소크라테스는 다수의 동의와 자신의 생존보다 논박 가능한 이유와 정의로운 삶을 우선했다. 확신을 인격과 동일시하지 않을 때 질문과 반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원전 번역:
그래서 나는 지혜롭다는 평판을 가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갔다. 그의 이름을 여기서 밝힐 필요는 없다. 내가 골라 조사해 본 사람은 정치가였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살펴보자, 그는 많은 사람에게 지혜롭다고 여겨졌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지혜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에게 설명하려 했다. 그 결과 그는 나를 미워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곳을 떠나면서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름답고 좋은 것에 관해 아는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나는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바로 이 작은 점에서는 내가 그보다 더 지혜로운 듯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뒤 나는 더 높은 지혜의 평판을 가진 다른 사람에게 갔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와 다른 여러 사람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Plato, *Apology* 21c–d.
3. 붓다 - 전승과 확신을 넘어 결과를 살피는 검토
#### *Kesamutti Sutta (Kālāma Sutta)* (AN 3.65, 깔라마 숫따)
깔라마 사람들은 여러 수행자와 교사가 마을을 찾아와 서로 다른 가르침을 주장하고 상대의 가르침을 비판하자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붓다에게 묻는다. 이 질문은 단순한 회의주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권위 있는 사람이 강한 확신으로 말하고, 오랜 전통과 많은 사람이 그 주장을 뒷받침할 때에도 상반된 가르침이 동시에 참일 수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문제다. 붓다는 소문, 전승, 경전의 권위, 논리적 추론, 그럴듯한 외관, 교사의 권위만으로 어떤 주장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한다. 동시에 모든 주장을 의심한 채 멈추라고도 하지 않는다. 탐욕·증오·어리석음을 키우는지,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낳는지, 지혜로운 사람에게 비판받을 만한지, 실제로 실행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살피라고 제안한다.
저작과 위치: 《앙굿따라 니까야》 3.65, 깔라마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는 대목.
#### 중심 생각
확신의 강도는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흔들리지 않는지를 보여 줄 수 있지만, 믿음의 내용이 현실과 일치한다는 사실까지 보장하지 않는다. 서로 반대되는 믿음을 가진 두 사람도 똑같이 확신할 수 있다. 개인의 생생한 체험, 공동체의 오랜 전통, 존경하는 교사의 인격은 믿음을 형성하는 중요한 배경이지만, 그것만으로 다른 사람이 그 믿음을 참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근거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깔라마 숫따의 검토는 자연과학의 실험 절차와 같지 않다. 여기서 결과는 주로 삶과 행위의 윤리적 방향을 포함한다. 어떤 믿음이 욕망과 적의를 강화하고 타인을 해치도록 만드는지, 탐욕과 증오를 줄이고 복지와 평온을 낳는지를 실제 삶에서 살핀다. 따라서 믿음은 문장의 사실성뿐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까지 포함하여 평가된다. 좋은 결과가 모든 형이상학적 주장의 진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이끄는 가르침의 신뢰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원전 번역: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고, 망설이는 것도 당연하다. 의심할 만한 일에서 그대들에게 의심이 생겨난 것이다. 자, 깔라마들이여.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문만으로도, 경전에 실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논리적 추론만으로도, 추론해 얻은 결론만으로도, 여러 이유를 숙고한 결과만으로도, 숙고한 견해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도, 말하는 사람이 그럴듯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수행자는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생각만으로도 받아들이지 말라. 그러나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스스로 ‘이러한 것들은 불선하다. 이러한 것들은 비난받을 만하다. 이러한 것들은 지혜로운 이들에게 비판받는다.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여 실천하면 해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진다’고 알게 될 때에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
*Aṅguttara Nikāya* 3.65, *Kesamuttisutta*, SC 4 (Pāli: “Etha tumhe, Kālāmā, mā anussaven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