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세계를 새롭게 보고 경이를 느끼는 경험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익숙한 세계는 예측 가능성과 안정감을 주지만, 반복해서 보는 대상은 주의에서 사라지기 쉽다. 매일 걷는 길의 나무와 건물, 가까운 사람의 표정, 자신의 몸과 생활 도구는 늘 존재하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게 된다. 어느 순간 평범한 장면이 낯설고 놀랍게 느껴질 때 사람은 세계가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고 말한다. 경이는 새로운 대상을 만날 때만 생기는지, 익숙한 것에 대한 주의가 바뀔 때도 생기는지, 이 경험이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질문이 된다. 경이의 계기는 다양하다. 어린이는 처음 보는 자연 현상과 사물의 원리에 반복해서 질문하며, 과학자는 잘 알려진 현상에서 설명되지 않은 패턴을 발견한다. 예술 작품은 일상적인 몸과 공간을 다른 구도와 언어로 보여 주고,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은 자신의 도시와 문화가 낯설게 보이는 경험을 한다. 질병이나 상실을 겪은 사람은 평범한 식사와 호흡, 가까운 사람의 존재를 새롭게 느낄 수 있다. 명상과 종교 의례는 익숙한 감각과 행위를 천천히 경험하게 하며, 천문학과 생물학의 지식은 일상의 사물을 거대한 시간과 관계 속에 놓는다. 기술도 현미경과 사진을 통해 보이지 않던 세계를 드러낸다. 경이는 기쁨과 호기심을 낳지만 항상 편안한 감정은 아니다. 세계의 규모와 복잡성 앞에서 자신의 작음을 느끼거나, 익숙한 질서가 낯설어져 불안해질 수 있다. 자연과 일상을 아름답게 보는 태도가 가난과 폭력, 반복 노동의 어려움을 낭만화할 위험도 있다. 경이를 느낄 시간과 공간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며, 과로와 위기 속에서는 주의를 넓히기 어렵다. 반대로 경이가 현실의 문제를 잊게 하는 도피인지, 대상을 더 오래 이해하고 돌보게 하는 경험인지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 질문은 매일을 특별하게 바라보라는 조언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익숙함이 세계를 효율적으로 살아가게 하면서 무엇을 보이지 않게 하는지, 낯설게 보는 경험이 지식·감정·관계에 어떤 변화를 만드는지 이해하려는 물음이다. 경이는 대상의 속성인지 보는 방식의 변화인지, 개인적 감동인지 공동의 탐구와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경험인지도 쟁점이 된다. 평범한 세계가 새롭게 나타나는 순간은 인간의 주의와 의미 형성 방식 자체를 드러낸다.
1. 아리스토텔레스 — 익숙한 것에 대한 경이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원인을 탐구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는 자연과 인간의 행위, 지식의 여러 영역을 탐구하면서 사물의 원인과 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한 철학자다. 그는 무엇이 일어나는지 경험으로 아는 것과 왜 그러한지 원인을 아는 것을 구별했다. *Ta meta ta physika*(형이상학) 제1권 제2장에서는 지혜가 어떤 앎인지 밝히면서 철학의 시작을 경이에서 찾는다.
경이는 낯선 현상에 놀라는 경험이지만,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만이 목표는 아니다. 아래 논증은 무지를 자각하여 탐구를 시작하는 일과, 원인을 알게 되어 처음의 놀라움을 넘어서는 일을 함께 다룬다.
> *“이 학문이 제작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은 최초의 철학자들의 역사에서도 분명하다. 사람들은 지금도 처음에도 경이 때문에 철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눈앞의 분명한 난점들을 이상하게 여겼고, 조금씩 나아가 달과 해와 별의 현상이나 우주의 생성과 같은 더 큰 문제들에 관해 물었다. 난처해하고 경이로워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신화는 경이로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철학했다면, 그들은 어떤 유용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알기 위해 지식을 추구했던 것이 분명하다. 실제 사정도 이것을 뒷받침한다. 삶의 필수품과 안락함과 여가를 위한 것들이 거의 모두 마련된 뒤에야 이러한 지식이 추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어떤 이익을 위해 이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말하듯이, 이 학문도 오직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므로 유일하게 자유로운 학문으로 추구한다.
> 그러므로 이 학문의 소유는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인간의 본성은 여러 면에서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모니데스의 말처럼 오직 신만이 이 특권을 가질 수 있으며, 인간이 자기에게 맞는 지식만을 찾는 데 만족하지 않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인들이 하는 말에 무언가 진실이 있고 신적인 힘에 질투가 본래적이라면, 이 경우에 무엇보다 질투가 일어날 것이고 이 지식에서 뛰어난 사람들은 모두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신적인 힘은 질투할 수 없다. 속담처럼 시인들은 거짓말을 많이 한다. 또한 다른 어떤 학문도 이런 학문보다 더 존귀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가장 신적인 학문이 가장 존귀하기 때문이다. 이 학문만이 두 가지 의미에서 가장 신적이어야 한다. 신이 갖기에 가장 적합한 학문은 신적인 학문이며, 신적인 대상을 다루는 학문도 신적이다. 이 학문만이 두 성격을 모두 갖는다. 신은 모든 것의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며 최초의 원리라고 여겨지고, 그러한 학문은 신만이 갖거나 누구보다 신이 갖기 때문이다. 모든 학문이 이 학문보다 더 필요하기는 하지만, 어느 것도 더 좋지는 않다.
> 그러나 이 학문을 얻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탐구를 시작했을 때와 반대되는 상태로 끝나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처음에 사물들이 그러하다는 사실에 경이로워한다. 스스로 움직이는 인형, 태양이 되돌아서는 때,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변과 공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러하다. 원인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작은 단위로도 함께 측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원인을 배우는 이런 경우들에서처럼, 우리는 반대되는 상태, 속담에 따르면 더 나은 상태에서 끝나야 한다. 대각선이 변과 공약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되는 것보다 기하학자를 더 놀라게 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출전: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제1권 제2장, 982b11–983a21. 원문 번역
2. 랠프 월도 에머슨 — 자연을 새롭게 보는 경험은 사적인 자아를 넘어 더 큰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낸다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미국의 사상가이자 수필가로서, 개인이 전해 받은 관습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연과 정신을 직접 경험할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는 미국 초월주의의 중심 인물로서 자연을 물질적 효용의 목록에 한정하지 않고 인간이 보편적 존재와 관계 맺는 통로로 보았다. *Nature*(자연, 1836)는 이러한 경험을 시적이면서 철학적인 언어로 전개한다.
제1장의 별과 풍경은 익숙한 대상을 새롭게 보는 경험을 보여 준다. 이어지는 ‘투명한 눈알’의 비유에는 소유와 지위로 규정된 자아가 느슨해지고 신적 전체에 속한다고 느끼는 초월주의적 전제가 담겨 있다.
> *“고독 속으로 들어가려면 사람은 사회에서 물러나는 것만큼 자기 방에서도 물러나야 한다. 아무도 곁에 없더라도 읽고 쓰는 동안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 홀로 있고 싶다면 별들을 바라보라. 저 하늘의 세계들에서 오는 빛은 그와 그가 만지는 것들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다. 대기가 투명하게 만들어진 것은 천체들 속에서 숭고함이 언제나 현존하게 하려는 뜻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도시의 거리에서 보아도 별들은 얼마나 위대한가! 별들이 천 년에 단 하룻밤만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믿고 경배하며, 자신들에게 나타났던 신의 도시에 대한 기억을 여러 세대 동안 간직하겠는가! 그러나 매일 밤 이 아름다움의 사자들이 나타나, 일깨우는 미소로 우주를 밝힌다.
> 별들은 언제나 있으면서도 닿을 수 없기에 어떤 경외를 일으킨다. 그러나 마음이 그 영향에 열려 있으면 자연의 모든 대상도 비슷한 인상을 준다. 자연은 결코 초라한 모습을 하지 않는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도 자연의 비밀을 모두 빼내고 그 완전함을 알아냈다고 해서 호기심을 잃지는 않는다. 지혜로운 정신에게 자연은 결코 장난감이 되지 않았다. 꽃과 동물과 산들은 어린 시절의 소박한 마음을 기쁘게 했던 것만큼, 그 사람의 가장 훌륭한 순간의 지혜도 비추었다.
> 이런 방식으로 자연을 말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분명하면서도 매우 시적인 의미가 있다. 우리가 뜻하는 것은 다양한 자연 대상들이 만들어 내는 인상의 온전한 전체다. 이것이 나무꾼의 목재와 시인의 나무를 구별한다. 오늘 아침 내가 본 매력적인 풍경은 분명 스무 개나 서른 개쯤 되는 농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밀러는 이 밭을, 로크는 저 밭을, 매닝은 그 너머의 숲을 소유한다. 그러나 그들 누구도 풍경을 소유하지 않는다. 지평선에는 모든 부분을 통합하여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 곧 시인만이 갖는 어떤 속성이 있다. 이것은 그 사람들의 농장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지만, 그들의 소유권 증서는 그것에 대한 권리를 주지 않는다.”*
출전: 에머슨, 『자연』 제1장 「자연」, 첫 세 문단. 원문
> *“숲에서 우리는 이성과 신앙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나는 삶에서 어떤 불명예나 재난이 닥치더라도, 내 눈을 남겨 두기만 한다면, 자연이 회복시킬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느낀다. 맨땅 위에 서서 머리는 상쾌한 공기에 잠기고 무한한 공간으로 들어 올려지면, 모든 비좁은 이기심이 사라진다. 나는 투명한 눈알이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것을 본다. 보편적 존재의 흐름이 내 안을 순환한다. 나는 신의 일부이거나 작은 입자다. 가장 가까운 친구의 이름조차 낯설고 우연적인 것으로 들린다. 형제나 지인, 주인이나 하인이라는 것은 사소하며 방해가 된다. 나는 갇히지 않는 불멸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출전: 같은 장, 숲에서 보편적 존재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문단 중. 원문
3.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 — 현상의 원인을 알아도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놀라움은 남는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은 유대교 사상가로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태도와 하느님 앞에서 응답하는 태도의 관계를 탐구했다. 그는 경이를 종교적 사유의 지속적인 바탕으로 보았다. *God in Search of Man: A Philosophy of Judaism*(사람을 찾는 하느님, 1955) 제4장 「경이」에서는 원인을 묻는 놀라움과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놀라움을 구별한다.
> *“경이 또는 근원적 놀라움은 종교적 인간이 역사와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출전: 헤셸, 『사람을 찾는 하느님』 제4장 「경이」, 44쪽, 「두 종류의 경이」 첫 문장. 원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