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누릴 수 있는가?
기쁨은 좋은 사건을 경험하는 감정이지만, 소중할수록 잃을 가능성도 함께 떠오를 수 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별이 두렵고, 건강이 회복될수록 다시 아플 가능성이 보이며, 성공의 순간에는 내려가야 할 미래를 예상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기쁨을 충분히 느끼면 나중의 상실이 더 아플 것 같아 감정을 미리 줄인다. 행복을 드러냈다가 부러움이나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한 경험 안에서 충돌하기 때문에 질문이 생긴다. 두려움은 여러 배경에서 나타난다. 반복된 상실과 배신을 겪은 사람은 좋은 일이 오래가지 않았던 기억 때문에 안전한 순간에도 경계한다. 경제적 불안이 큰 사람은 수입이 늘거나 휴가를 얻어도 다음 위기에 대비하느라 즐거움을 미룰 수 있다. 아이를 얻은 부모는 사랑과 기쁨이 커질수록 아이가 다칠 가능성을 더 강하게 상상한다. 오랜 질병 뒤 회복한 사람은 몸의 변화를 기뻐하면서 재발 신호를 계속 살핀다. 사회적 참사와 타인의 고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기쁨이 무책임하거나 불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은 주변 관계가 달라질까 염려할 수 있다. 기쁨을 누린다는 말도 감정을 크게 표현하는 것, 현재에 주의를 두는 것, 좋은 상태가 지속되리라 믿는 것 가운데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상실 가능성을 의식하면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고, 불안을 느낀다고 기쁨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두려움을 억누르고 긍정적인 감정만 유지하려 하면 실제 위험과 복잡한 감정이 가려질 수 있다. 기쁨을 줄이는 태도는 실망을 예방하는 전략처럼 보이지만, 상실이 왔을 때 고통을 실제로 줄이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화에 따라 기쁨을 공개하는 방식과 겸손의 규범도 다르다. 이 질문은 두려움을 없앤 뒤 기뻐하라는 요구를 담지 않는다. 좋은 경험을 잃을 가능성, 그것을 누릴 자격에 대한 감각, 타인의 시선, 과거의 상실이 현재의 기쁨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이해하려는 물음이다. 기쁨과 두려움은 한 대상이 중요하다는 사실에서 함께 생길 수 있다.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서 현재의 좋은 경험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기쁨을 줄이는 일이 무엇을 보호하려 하는지를 묻는 데 이 질문의 중심이 있다.
1. 세네카 — 상실에 흔들리지 않는 기쁨은 외적 행운보다 올바른 판단과 행위에 근거한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경–서기 65년)는 로마의 정치가이자 스토아 철학자로서, 운명에 좌우되는 삶 속에서 무엇을 참된 선으로 삼아야 하는지 탐구했다. 그는 철학을 논변의 지식에 그치지 않고 욕망과 두려움, 판단을 훈련하는 삶의 실천으로 보았다. *Epistulae morales ad Lucilium*(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서한) 제23서한에서는 우연이 주는 즐거움과 자기 안의 선에서 생기는 기쁨을 구별한다.
아래 대목의 ‘엄숙한 기쁨’은 표정을 밝게 유지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죽음·가난·고통 앞에서도 올바른 판단을 지킬 수 있다는 도덕적 확신에 가깝다.
>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루킬리우스여, 이것을 너의 일로 삼아라. 기뻐하는 법을 배워라. 내가 우연이 주는 선물들을 없애려 하고,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가장 달콤한 것인 희망을 피하라고 권할 때, 네게서 많은 즐거움을 빼앗는다고 생각하는가? 정반대다. 나는 네가 결코 기쁨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그 기쁨이 네 집에서 태어나기를 바란다. 네 안에 있기만 하다면 그것은 거기서 태어난다. 그 밖의 즐거운 것들은 사람의 가슴을 채우지 못한다. 이마를 잠깐 펴 줄 뿐이며 변덕스럽다. 물론 네가 웃는 사람에게 기쁨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모르겠다. 영혼 자체가 행복하고 자신감 있어야 하며 모든 상황 위에 서 있어야 한다.
> 나를 믿어라. 참된 기쁨은 엄숙한 일이다. 걱정 없는 얼굴로, 또는 우리의 젊은 멋쟁이들이 말하듯 명랑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죽음을 경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가난에 문을 열거나, 쾌락에 고삐를 매거나, 고통을 견딜 일을 숙고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마음속으로 숙고하는 사람은 참으로 기쁨에 차 있지만, 그것은 들뜬 기쁨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네가 소유하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이 기쁨이다. 일단 그 근원을 발견하면 그것은 결코 너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 빈약한 광산의 산출물은 표면에 있다. 참으로 풍부한 광산은 광맥이 깊이 숨어 있으며, 끊임없이 파고드는 사람에게 더 풍성한 수확을 준다. 마찬가지로 군중을 즐겁게 하는 장식품들은 표면에 입힌 얇은 즐거움만을 제공한다. 도금만 된 모든 기쁨에는 참된 토대가 없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기쁨, 너를 이끌어 가려 애쓰는 기쁨은 단단한 것이며, 더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충만하게 드러난다.
> 그러므로 가장 사랑하는 루킬리우스여, 너를 참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을 하기를 청한다. 밖으로 번쩍이며 다른 사람이 네게 내밀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발아래 두어라. 참된 선을 바라보고 네 자신의 곳간에서 나오는 것만을 기뻐하여라. ‘네 자신의 곳간’이란 무슨 뜻인가? 바로 너 자신, 네 안의 가장 좋은 부분을 뜻한다. 연약한 몸 역시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중요한 것보다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몸은 우리를 헛되고 짧으며 곧 후회하게 되는 쾌락에 얽어맨다. 그것들을 극도의 절제로 다스리지 않으면 반대되는 것으로 바뀔 것이다. 내 말은 이러하다. 쾌락은 한계 안에 붙들어 두지 않으면 슬픔의 심연으로 곤두박질치려 한다. 그런데 좋다고 믿는 것을 한계 안에 붙들어 두기는 어렵다. 참된 선은 안전하게 갈망할 수 있다.”*
출전: 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서한』 23.3–6. 원문
2. 에피쿠로스 — 필요한 욕망과 헛된 욕망을 분별하면 특정한 즐거움의 상실에 덜 종속된다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270)는 인간이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 수 있는 조건을 탐구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다. 그는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면서도, 그 때문에 모든 즐거움을 선택해야 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무엇이 뒤에 더 큰 괴로움을 가져오는지 분별하는 사려 깊음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Epistolē pros Menoikea*(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러한 삶의 방향을 짧게 정리한다.
미래의 불확실성, 욕망의 구분, 쾌락과 고통의 비교는 한 논증으로 연결된다. 즐거운 삶의 기준은 자극을 무한히 늘리는 데 있지 않으며, 몸의 고통과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는 데 있다.
> *“미래는 전적으로 우리의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우리의 것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반드시 오리라고 기대해서도 안 되고,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고 절망해서도 안 된다.
> 욕망 가운데 어떤 것은 자연적이고 어떤 것은 헛되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자연적인 욕망 가운데 어떤 것은 필요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자연적일 뿐이다. 필요한 욕망 가운데 어떤 것은 행복을 위해, 어떤 것은 몸이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것은 생명 자체를 위해 필요하다. 이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하면 모든 선택과 회피를 몸의 건강과 마음의 평온으로 이끌 수 있다. 이것이 행복한 삶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일을 하는 것은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일단 그것을 이루면 영혼의 모든 폭풍은 가라앉는다. 살아 있는 존재는 더 이상 부족한 것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으며, 영혼과 몸의 선을 충족할 또 다른 것을 찾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쾌락을 필요로 하는 것은 쾌락이 없어서 고통을 겪을 때다. 고통을 겪지 않을 때에는 더 이상 쾌락이 필요하지 않다. 이 때문에 우리는 쾌락을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 우리는 쾌락이 최초의 것이며 우리 본성에 친근한 선임을 안다. 우리는 거기에서 모든 선택과 회피를 시작하며, 느낌을 모든 선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으면서 그것으로 돌아간다. 쾌락이 최초의 것이며 본래적인 선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모든 쾌락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어떤 쾌락들 때문에 더 큰 불편함이 뒤따르면 많은 쾌락을 지나쳐 버린다. 또한 오랫동안 고통을 견딘 뒤 더 큰 쾌락이 따라올 때에는 많은 고통을 쾌락보다 낫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모든 쾌락은 본성상 우리와 친근하기 때문에 선이지만, 모든 쾌락이 선택할 만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고통은 악이지만 모든 고통을 언제나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익과 불이익을 서로 재고 살펴서 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다. 때로 우리는 선을 악처럼 다루고, 반대로 악을 선처럼 다루기 때문이다.”*
출전: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7–130의 미래·욕망·선택과 회피에 관한 대목. 원문 번역
3. 코헬렛 — 기쁨의 유한함을 알면서도 지금 주어진 몫을 하나님의 선물로 누린다
코헬렛(Qohelet, 저자 신원·생몰년 미상)은 『전도서』에서 말하는 지혜자의 명칭이다. 이 책은 인간의 수고와 지혜가 죽음과 우연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성찰한다. 왕의 목소리를 사용하는 문학적 형식만으로 역사적 저자를 확정할 수는 없다. 히브리어 서명 *Qohelet*(전도서)은 세상의 덧없음을 말하면서도 먹고 마시고 사랑하며 수고 가운데 좋은 것을 누리는 일을 함께 말한다.
아래 구절들의 ‘몫’과 ‘선물’은 영원한 소유의 보증과 구별된다. 인간이 삶의 전체를 파악하거나 장악할 수 없다는 조건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 *“9절 일하는 사람이 자기 수고에서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
> 10절 나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어 애쓰게 하신 일을 보았다.
> 11절 그는 모든 것을 때에 맞게 아름답게 하셨고,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낼 수 없다.
> 12절 나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기뻐하고 좋은 것을 누리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안다.
> 13절 또한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기의 모든 수고 가운데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 14절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영원히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거기에 더할 수도 없고 거기서 뺄 수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경외하도록 그렇게 하셨다.”*
출전: 『전도서』 3:9–14. 히브리어 본문
> *“보라, 내가 보기에 좋고 합당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삶의 날들 동안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가운데 먹고 마시며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재물과 소유를 주시고, 그것을 누리며 자기 몫을 받고 자기 수고를 기뻐할 능력을 주신 모든 사람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출전: 『전도서』 5:18–19, 히브리어 성경 절 번호 5:17–18. 히브리어 본문
> *“7절 가서 기쁨으로 네 빵을 먹고 좋은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셔라. 하나님이 이미 네 행위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 8절 네 옷은 언제나 희게 하고, 네 머리에 기름이 부족하지 않게 하라.
> 9절 해 아래에서 그가 네게 주신 덧없는 삶의 모든 날 동안, 곧 네 덧없는 삶의 모든 날 동안,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삶을 누려라. 이것이 삶에서 네 몫이며, 해 아래에서 네가 하는 수고에서 네 몫이기 때문이다.
> 10절 네 손이 찾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네 힘을 다해 하라. 네가 가는 스올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
출전: 『전도서』 9:7–10. 히브리어 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