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거나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때 어떻게 접근할까?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거나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경험은 감정이 실제로 없는 것인지, 알아차리고 이름 붙이는 과정이 막힌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한다. 사람은 감정을 몸의 긴장과 에너지, 생각과 행동 충동을 통해 경험하지만, 언제나 “슬프다”, “화가 난다”처럼 명확한 언어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강한 사건 뒤에 무감각이 먼저 오거나, 여러 감정이 동시에 나타나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지 않을 수도 있다. 감정을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과 자기 의심을 만들기 때문에 질문이 생긴다. 이 경험의 배경은 다양하다. 오랫동안 감정 표현을 약함이나 무례함으로 배운 사람은 몸의 신호를 느껴도 언어로 연결하지 못할 수 있다. 위기와 폭력 속에서는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일이 행동과 생존을 방해해 무감각이 보호 기능을 가질 수 있다. 돌봄과 업무를 오래 수행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보다 해야 할 일에 주의를 두면서 내면의 신호를 뒤늦게 알아차린다. 우울과 소진, 특정 약물, 신경학적·신체적 상태는 감정의 강도와 표현을 바꿀 수 있고, 자폐 스펙트럼 등 신경다양성의 경험에서는 감정을 감지하고 분류하는 방식이 일반적 기대와 다를 수 있다. 문화와 언어에 따라 감정 범주도 달라진다. 감정이 없다는 말에는 평온, 지루함, 공허함, 압도, 해리, 관심의 부족이 서로 다른 비중으로 들어갈 수 있다. 슬픈 사건에서 울지 않는다고 슬픔이 없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몸의 통증이나 피로가 감정 대신 앞에 나타날 수도 있다. 반대로 주변이 특정한 감정을 기대하기 때문에 실제로 느끼지 않는 감정을 찾아내려 할 수도 있다. 가족의 죽음, 출산, 졸업과 같은 사건은 사회가 정해 둔 감정의 각본이 강해 자신의 실제 경험과 기대가 어긋나기 쉽다. 감정의 존재, 표현, 인식, 사회적 해석은 같은 층위가 아니다. 이 질문은 감정을 만들어 내거나 즉시 이름 붙이는 방법을 먼저 제시하지 않는다. 지금 알아차리는 몸의 감각, 떠오르는 생각, 피하고 싶은 행동, 사건과 시간의 관계가 감정 경험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이해하려는 물음이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안전을 위한 거리인지, 지친 신경계의 반응인지, 평온인지, 아직 언어가 없는 복합 감정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감정을 모른다는 경험도 마음의 작동 방식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성립한다.
1. 윌리엄 제임스 — 감정을 알아차리려면 그 경험을 이루는 신체 변화도 살펴야 한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철학자이자 심리학자로서, 의식과 감정이 실제 경험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하려 했다. 그는 감정의 이름을 분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사건을 지각한 뒤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그것을 느끼는 경험의 관계를 물었다. *The Principles of Psychology*(심리학의 원리, 1890) 제2권 제25장에서는 특히 몸의 반응이 뚜렷한 슬픔·두려움·분노 등의 감정을 중심으로 자신의 가설을 제시한다.
그의 주장은 감정이 몸에 영향을 준다는 말보다 강하다. 사건의 지각 뒤에 신체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를 느끼는 것이 감정이라는 설명이다. 아래 대목은 그 순서를 제시한 뒤 몸을 의식의 변화에 울리는 공명판에 비유한다.
> *“이러한 강한 감정들에 관해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방식은, 어떤 사실을 마음으로 지각하면 감정이라고 불리는 마음의 상태가 일어나고, 이 상태가 다시 신체적 표현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이론은 흥분을 일으키는 사실을 지각한 뒤 신체 변화가 곧바로 일어나며, 그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것이 바로 감정이라는 것이다. 상식은 우리가 재산을 잃으면 슬퍼하고 운다고, 곰을 만나면 두려워하고 달아난다고, 경쟁자에게 모욕당하면 화가 나고 때린다고 말한다. 여기서 옹호하려는 가설은 이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하나의 마음 상태가 다른 마음 상태를 곧바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먼저 신체적 현상이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합리적인 진술은 우리가 울기 때문에 슬프고, 때리기 때문에 화가 나며, 떨기 때문에 두렵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두렵기 때문에 울고 때리고 떠는 것이 아니다. 지각 뒤에 신체 상태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 지각은 순전히 인지적인 형태를 지닐 것이며, 창백하고 색채도 없고 감정의 온기도 없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곰을 보고 달아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거나, 모욕을 받고 때리는 것이 옳다고 여길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두려움이나 분노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 이렇게 거칠게 진술하면 이 가설은 거의 틀림없이 즉각적인 불신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그 역설적인 성격을 누그러뜨리고 어쩌면 그 진실성을 확신하게 하는 데에는 많은 논거나 멀리서 끌어온 논거가 필요하지 않다.
> 우선 앞의 두 장을 읽은 독자라면 대상이 미리 조직된 기제를 통해 신체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의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변화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미묘하기 때문에, 유기체 전체를 아무리 작은 의식의 변화에도 울릴 수 있는 공명판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유기적 활동이 이룰 수 있는 여러 순열과 조합은, 아무리 미세한 감정의 색조라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 마음의 상태만큼 고유한 신체적 울림을 갖는 것을 추상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각각의 감정에서 변하는 부분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감정의 완전하고 통합된 표현을 냉정한 상태에서 재현하기가 그토록 어렵다. 수의근의 움직임은 흉내 낼 수 있어도 피부와 분비샘과 심장과 그 밖의 내장에서는 실패한다. 인위적으로 흉내 낸 재채기에 실제 재채기의 무엇인가가 빠져 있듯이, 감정을 평소에 일으키는 원인 없이 감정을 흉내 내려는 시도에는 흔히 속이 빈 듯한 점이 있다.”*
출전: 제임스, 『심리학의 원리』 제2권 제25장, 449–450쪽. 원문
2. 제러미 호헤번·조던 그래프먼 — 감정을 식별하고 표현하는 어려움을 감정의 부재와 구별한다
제러미 호헤번(Jeremy Hogeveen, 출생 연도 미상)과 조던 그래프먼(Jordan Grafman, 1950– )은 감정에 대한 자각이 어떤 신경인지적 기능에 의존하는지 연구해 온 심리학·신경심리학 연구자들이다. 이들은 감정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험을 의지나 인격만의 문제로 설명하지 않고, 뇌 손상과 감정 인식 사이의 관계를 조사했다.
호헤번·그래프먼 등이 발표한 *Acquired alexithymia following damage to the anterior insula*(전방 섬엽 손상 뒤 나타나는 후천적 감정표현불능증, 2016)는 그 연구의 한 사례다. 알렉시티미아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알아차리고 식별하는 어려움과 관련된 개념이다. 이 연구는 뇌 손상 집단을 대상으로 하므로, 일상에서 감정을 잘 모르겠다고 느끼는 사람 모두에게 같은 원인을 적용할 수는 없다.
> *“알렉시티미아는 자신의 감정 상태에 대한 자각이 손상되는 특징을 지닌 준임상적 상태이며, 정신건강과 사회적 상호작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출전: J. Hogeveen, G. Bird, A. Chau, F. Krueger, J. Grafman, 「전방 섬엽 손상 뒤 나타나는 후천적 감정표현불능증」, *Neuropsychologia* 82(2016), 142–148쪽, 초록 첫 문장. 연구 원문 초록 · DOI
3. 붓다 — 느낌의 쾌·불쾌·중성을 알아차리되 그것을 고정된 나로 붙잡지 않는다
붓다(Buddha, 기원전 5세기경, 정확한 생몰년 미상)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탐구하면서, 경험을 관찰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수행을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을 전승하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느낌의 관찰은 몸·마음·법의 관찰과 함께 수행의 한 부분을 이룬다. *Mahāsatipaṭṭhāna Sutta*(대념처경), 곧 『디가 니까야』 22경은 이러한 수행을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웨다나(vedanā)는 즐거움·괴로움·그 어느 쪽도 아님이라는 느낌을 가리킨다. 분노나 수치심처럼 상황 판단과 이야기가 얽힌 감정 전체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아래 대목은 느낌의 종류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하여 그것의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고 집착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간다.
> *“비구들이여,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여기서 비구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비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비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비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비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비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비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 이와 같이 안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물고, 밖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물고, 안팎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느낌에서 발생하는 성질을 관찰하며 머물고, 소멸하는 성질을 관찰하며 머물고, 발생하고 소멸하는 성질을 관찰하며 머문다. 또는 오직 앎과 알아차림에 필요한 만큼 ‘느낌이 있다’는 알아차림이 그에게 확립된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상의 어떤 것도 붙잡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출전: 『디가 니까야』 22 「대념처경」, 느낌의 관찰(Vedanānupassanā) 전체. 팔리어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