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L Archive
WQ041

반복되는 일상이 공허할 때 무엇을 돌아볼까?

반복되는 일상은 삶을 안정시키는 리듬이면서 동시에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간다는 감각을 만들 수 있다. 식사와 출근, 돌봄과 집안일은 생명과 관계를 유지하지만 끝나도 다시 시작되고 뚜렷한 완성점이 없다. 처음에는 원했던 직업과 관계도 익숙해지면 감각적 새로움이 줄어든다. 이때 공허함은 반복 자체에서 오는지, 그 반복이 자신의 가치와 연결되지 않아서 생기는지, 몸과 마음이 지쳐 의미를 느끼기 어려워진 상태인지 분명하지 않다. 같은 일상이 안정과 공허를 함께 줄 수 있다는 점이 질문을 만든다. 공허함의 모습은 생활 영역에 따라 다르다. 직장인은 성과를 내고도 일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기 어려울 때 자신이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느낄 수 있다. 어린 자녀나 아픈 가족을 돌보는 사람은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반복과 고립 속에서 자기 삶이 사라진다고 느낄 수 있다. 은퇴한 사람은 바쁜 역할에서 벗어난 뒤 오랫동안 일상이 제공하던 시간표와 소속을 잃는다. 가사와 생계가 안정된 사람도 미래에 기대할 변화가 없다고 느낄 수 있고, 경제적 압박 속의 사람은 생존을 위한 반복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기 어렵다. 디지털 환경의 끊임없는 자극은 지루함을 줄이면서 일상의 경험을 더 얕게 만들 수도 있다. 공허함은 삶에 실제 의미가 없다는 판단일 수 있고, 의미를 느끼는 능력이 일시적으로 약해진 상태일 수도 있다. 우울과 소진, 수면 부족은 이전에 중요했던 활동의 감각을 바꾸며, 사회가 성공으로 인정하는 반복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욕망과 어긋날 수 있다. 반대로 새로운 경험을 계속 찾아도 익숙해짐은 반복되고, 강한 자극이 평범한 만족을 느끼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반복이 문제인지, 반복을 둘러싼 관계와 권력, 선택권의 부족이 문제인지도 구분되지 않는다. 같은 일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과 강제로 맡은 사람의 경험은 다르다. 이 질문은 일상을 바꾸거나 의미 있는 활동을 추가하라는 처방보다 공허함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하려는 물음이다. 반복되는 행동이 누구의 삶을 지탱하고 어떤 가치와 연결되는지, 그 과정에서 선택과 인정, 휴식이 얼마나 있는지, 공허함이 특정 활동에만 나타나는지 삶 전체로 퍼지는지를 살펴본다. 평범한 반복이 깊이를 만들 수 있다는 관점과 반복이 사람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관점이 함께 존재한다. 그 사이에서 지금의 공허함이 어떤 삶의 구조를 드러내는지가 질문의 중심이다.

1. 윌리엄 모리스 — 반복의 공허를 노동의 휴식·산물·과정이 빼앗긴 조건에서 살핀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예술가이자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일과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삶을 함께 바꾸려 했다. 그는 노동을 많이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삶이 훌륭해지는지 물었으며,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배분이 노동의 기쁨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비판했다. *Useful Work versus Useless Toil*(쓸모 있는 일과 쓸모없는 노역, 1884)에서 제시하는 세 가지 희망은 개인의 근면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라 노동이 인간에게 무엇을 돌려주는지 묻는 기준이다.
아래 대목은 휴식이 있다는 막연한 약속을 넘어, 충분하고 불안에 방해받지 않는 휴식, 실제로 누릴 수 있는 산물, 정신과 몸을 사용하는 창조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논증이다.
> *“그렇다면 노동 안에 있을 때 그 노동을 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희망은 어떤 성격의 것인가? 내 생각에 그것은 세 가지다. 휴식에 대한 희망, 생산물에 대한 희망, 일 자체에서 얻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이다. 또한 그것들이 어느 정도 풍부하고 좋은 질을 갖추리라는 희망이다. 누릴 만할 만큼 충분하고 좋은 휴식, 어리석은 사람이나 금욕주의자가 아닌 사람에게 소유할 가치가 있는 생산물, 일하는 동안 우리 모두가 의식할 만큼 충분한 즐거움이다. 그것은 단지 습관이어서는 안 된다. 그 습관을 잃었을 때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 만지작거리던 끈을 잃은 것처럼 느끼는 정도여서는 안 된다.
> 나는 휴식의 희망을 먼저 놓았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 가운데 가장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에는 즐거움이 있더라도 모든 노동에는 분명 어느 정도 고통이 있다. 잠들어 있던 힘을 일깨워 움직이게 하는 동물적 고통, 사정이 꽤 괜찮을 때 변화를 두려워하는 동물적 두려움이다. 이 동물적 고통에 대한 보상은 동물적 휴식이다. 우리는 일하는 동안 일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을 느껴야 한다.
> 또한 휴식이 왔을 때에는 그것을 즐길 만큼 길어야 한다. 일하면서 소모한 힘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길어야 한다. 그리고 불안에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동물적 휴식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휴식을 즐길 수 없다. 이러한 양과 종류의 휴식을 누린다면 그 점에서 우리는 짐승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 생산물에 대한 희망에 관해서는, 자연이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노동을 강제한다고 이미 말했다. 이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실제로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거나, 적어도 우리가 원하거나 사용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상황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살피고 우리의 의지를 사용한다면 그 점에서 우리는 기계보다 나을 것이다.
> 일 자체에서 얻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은 내 독자들 가운데 일부에게, 아니 대부분에게 얼마나 낯설게 들리겠는가! 그러나 나는 모든 살아 있는 것에는 자기 힘을 사용하는 즐거움이 있으며, 짐승조차 유연하고 빠르고 강한 것을 즐거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이 일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리라고 느끼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은 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힘도 사용한다. 일하는 동안 기억과 상상력이 그를 돕는다.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지난 시대 사람들의 생각도 그의 손을 이끈다. 그는 인류의 한 부분으로서 창조한다. 우리가 이렇게 일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될 것이며, 우리의 날들은 행복하고 풍부할 것이다.
> 그러므로 가치 있는 노동에는 휴식에서 얻는 즐거움의 희망, 노동이 만드는 것을 사용하며 얻는 즐거움의 희망, 매일의 창조적 솜씨에서 얻는 즐거움의 희망이 따른다.”*
출전: 윌리엄 모리스, 「쓸모 있는 일과 쓸모없는 노역」, 세 가지 희망을 설명하는 대목. 원문

↑ 질문으로 돌아가기

2. 레프 톨스토이 — 일상의 공허가 삶 전체의 이유를 묻는다면 유한한 삶과 무한한 의미의 관계를 돌아본다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는 소설가이자 종교적 사상가로서, 명성과 재산을 얻은 사람이 왜 살아갈 이유를 잃을 수 있는지 자신의 삶을 통해 추궁했다. 그는 일상의 성공을 더 쌓는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의미의 위기를 겪었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과 신앙에서 삶을 지속하게 하는 앎을 찾으려 했다. *Исповедь*(참회록)는 그 탐색을 서술한 자전적 저작이다.
제4장의 멈춤은 생리적 활동의 중단이 아니라 욕망을 실현할 이유가 무너진 경험이다. 제5장은 이를 죽음에도 사라지지 않을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명시하며, 제9장은 유한한 삶을 무한한 것과 연결하는 신앙을 답으로 제시한다.
> *“내 삶은 멈추어 섰다. 나는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잠잘 수 있었고, 이 일들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삶은 없었다. 그 실현을 합당하다고 여길 수 있는 바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라더라도, 그 바람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 요정이 나타나 내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고 했더라도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출전: 톨스토이, 『참회록』 제4장 첫 문단. 원문
> *“나의 질문, 쉰 살의 나를 자살 직전으로 몰아갔던 질문은 가장 단순한 질문이었다. 어리석은 아이부터 가장 지혜로운 노인까지 모든 사람의 영혼 안에 있는 질문이었다. 내 경험으로 알게 되었듯이, 답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오늘 하는 일이나 내일 할 일에서 무엇이 나올 것인가? 내 삶 전체에서 무엇이 나올 것인가?’였다.
> 다르게 표현하면 질문은 이러하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왜 무엇인가를 바라거나 행해야 하는가?’ 또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나를 기다리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파괴하지 못하는 의미가 내 삶에 있는가?’”*
출전: 같은 책, 제5장, 삶의 질문을 세 방식으로 제시하는 두 문단. 원문
> *“이것을 이해한 뒤 나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성적 지식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성적 지식이 주는 답은 질문을 다르게 제기해야 하며,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관계가 질문에 포함될 때에만 답을 얻을 수 있음을 가리킬 뿐이었다.
> 그리고 신앙이 주는 답이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왜곡되어 있더라도, 모든 답에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관계를 도입한다는 이점이 있음을 이해했다. 이 관계 없이는 해결이 있을 수 없었다.
> 내가 어떤 식으로 질문하든 그 관계가 답에 나타났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 내 삶에서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영원한 고통이나 영원한 행복이다. 죽음이 파괴하지 못하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원한 하나님과의 결합, 천국이다.”*
출전: 같은 책, 제9장, 이성적 지식과 신앙의 답을 비교하는 대목. 원문

↑ 질문으로 돌아가기

3. 쇠렌 키르케고르 — 반복의 의미는 과거 감정의 재현보다 삶을 다시 받아들이는 데서 드러난다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개인이 자기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과 신앙의 문제를 탐구한 철학자이자 종교적 저술가다. 그는 여러 가명과 문학적 상황을 통해 개념을 설명하면서도, 설명을 아는 것과 그 가능성을 살아내는 것 사이의 간격을 드러냈다. *Gjentagelsen: Et Forsøg i den experimenterende Psychologi*(반복, 1843)는 콘스탄틴 콘스탄티우스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실험적 저작이다.
서두에서는 희망·회상·반복을 서로 다른 삶의 태도로 대비한다. 그러나 뒤따르는 이야기는 반복을 뜻대로 실행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가명 화자의 선언을 곧바로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처방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 *“희망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아름다운 처녀다. 회상은 아름다운 노부인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반복은 결코 싫증 나지 않는 사랑하는 아내다. 싫증 나는 것은 오직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옛것에는 결코 싫증 나지 않으며 그것을 자기 앞에 두면 행복해진다. 반복이 새로운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사람만이 참으로 행복해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반복에 싫증 나기 때문이다. 희망하려면 젊음이 필요하고, 회상하려면 젊음이 필요하지만, 반복을 의지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오직 희망하려는 사람은 비겁하고, 오직 회상하려는 사람은 쾌락을 좇는다. 그러나 반복을 의지하는 사람은 한 사람의 사내이며, 반복을 자신에게 더욱 힘 있게 밝혀 낼수록 더욱 깊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삶이 반복이며 이것이 삶의 아름다움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판결을 내린 것이며, 결국 자신에게 닥칠 운명, 곧 파멸보다 나은 운명을 받을 자격이 없다. 희망은 손짓하지만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열매이고, 회상은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여비다. 그러나 반복은 축복과 함께 배부르게 하는 일용할 양식이다. 존재를 한 바퀴 항해한 뒤에는 삶이 반복임을 이해할 용기가 있는지, 그것을 기뻐할 마음이 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출전: 키르케고르, 『반복』, 서두의 희망·회상·반복을 대비하는 대목. 1843년 초판 원문

↑ 질문으로 돌아가기

4. 알베르 카뮈 — 궁극적 의미가 보장되지 않아도 부조리를 의식하며 삶을 계속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소설가이자 사상가로서, 세계가 인간의 의미 요구에 답하지 않을 때에도 삶을 지속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그 간격을 성급한 초월적 해답으로 봉합하지 않고, 그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반항과 자유를 탐구했다. *Le Mythe de Sisyphe: Essai sur l’absurde*(시지프 신화, 1942)는 이 문제를 부조리라는 개념으로 전개한다.
마지막 장의 시지프는 노동이 언젠가 완결되리라는 보상을 얻지 못한다. 카뮈가 주목하는 것은 자기 조건을 아는 의식과, 그 조건이 자기 삶에 대한 판단까지 모두 빼앗도록 두지 않는 태도다.
> *“정상을 향한 투쟁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출전: 카뮈, 『시지프 신화』, 마지막 장 「시지프 신화」 마지막 두 문장. 프랑스어 원문

↑ 질문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