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시간을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혼자 있는 시간은 관계에서 배제된 고립으로 경험될 수도 있고, 타인의 요구와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과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으로 경험될 수도 있다. 외부에서 보면 같은 독거와 침묵도 당사자가 선택했는지, 언제든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지, 필요한 지원이 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 욕구와 혼자 있고 싶은 욕구가 모두 인간에게 존재하기 때문에, 충만한 고독이 무엇이며 고립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가 질문이 된다. 혼자 있는 방식은 삶의 조건에 따라 다르다. 창작자와 연구자는 집중을 위해 사람들과 거리를 두지만 작업을 나눌 관계를 필요로 할 수 있다. 종교 수행자는 침묵과 은둔을 통해 내면과 초월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전통과 공동체의 지지를 받는다. 재택근무자는 자율성과 편안함을 느끼면서 일상적 접촉과 시간의 경계를 잃을 수 있다. 혼자 사는 노인은 독립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응급 상황과 사회적 단절의 위험을 겪을 수 있다. 관계에서 상처받은 사람은 고독을 안전한 공간으로 경험하지만,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 두려움 때문에 닫혀 있을 수도 있다. 충만함은 활동의 양이나 긍정적 감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독서와 산책, 작업, 휴식처럼 스스로 선택한 리듬이 있을 수 있고, 특별한 활동 없이 지루함과 생각을 경험하는 시간도 있다. 혼자 있을 때 타인의 인정 없이 자신의 욕망과 가치가 무엇인지 더 잘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인의 반응이 없으면 자기 감각이 흐려지는 사람도 있다. 디지털 연결은 혼자 있는 공간 안에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들여오며, 물리적 고독과 심리적 고독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문화도 독립적인 개인과 긴밀한 가족 중 어느 모습을 이상적으로 보는지에 따라 고독의 의미를 달리한다. 이 질문은 혼자 있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채우는 방법만을 묻지 않는다. 그 시간이 선택과 강요, 회복과 회피, 자율성과 단절 가운데 어떤 경험으로 이루어지는지 이해하려는 물음이다. 혼자 있어도 관계의 기억과 사회적 자원이 삶을 지탱하며, 함께 있어도 내면의 공간이 필요할 수 있다. 충만한 고독의 가능성을 묻는 일은 인간이 타인에게 얼마나 의존하면서도 자신만의 시간과 주의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 묻는 일이기도 하다.
1. 미셸 드 몽테뉴 — 외부의 관계와 평가에 자신을 전부 맡기지 않을 때 혼자서도 자기와 대화할 수 있다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는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관찰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탐구한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수필가다. 그는 장소만 바꾸어도 마음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의심했다. 야망과 두려움을 그대로 지닌 채 물러난다면 조용한 곳에서도 이전의 삶에 계속 붙들릴 수 있다고 보았다.
*Essais*(수상록)의 「고독에 대하여」는 물리적인 은거와 자기에게 속하는 삶을 구별한다. 가족과 재산을 가질 수 있다면 가지되 행복 전체가 그것들에 달리게 하지는 말라는 논의에서, 자기만의 뒷방이라는 비유가 나온다. 이 방은 실제 건물보다 자기와 대화할 수 있도록 남겨 둔 내적 자리를 뜻한다.
“이것이 해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보물을 잘 골라,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우리 자신 외에는 누구도 배반할 수 없는 곳에 숨겨 두는 일이다. 아내와 자녀와 재산, 무엇보다 건강을 가질 수 있다면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이 거기에 달리도록 그것들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온전히 우리 것이며 온전히 자유로운 뒷방을 하나 남겨 두어, 그곳에 우리의 참된 자유와 주된 피난처와 고독을 세워야 한다. 여기에서는 우리 자신과 나누는 대화를 일상의 일로 삼되, 바깥의 사귐이나 교류가 들어설 자리가 없을 만큼 사적으로 해야 한다. 아내도 자녀도 재산도 수행원도 하인도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웃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잃는 일이 닥쳐도 그것들 없이 지내는 일이 낯설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자기 안으로 돌아설 수 있는 영혼이 있다. 영혼은 자기의 동반자가 될 수 있으며, 공격하고 방어하고 받아들이고 줄 것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고독 속에서 지루한 무위에 빠질까 두려워하지 말자.”
Michel de Montaigne, *Essais*, I.39, “De la solitude,” paragraphs beginning “Voylà que c’est de bien choisir” through “Nous avons une ame contournable.”
2. 헨리 데이비드 소로 — 자연과 감각의 세계에 주의를 기울일 때 혼자 있음은 관계의 공백만을 뜻하지 않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생활의 관습과 필요를 실제 삶의 실험으로 검토한 미국의 작가이자 사상가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노동과 소비, 교류의 방식에서 거리를 두고 무엇이 삶을 풍부하게 하는지 살폈다. 자연을 관찰하는 일은 그의 고독에서 단순한 배경을 넘어 중요한 관계의 경험을 이루었다.
*Walden; or, Life in the Woods*(월든)는 호숫가의 생활을 통해 삶의 조건을 시험한 기록이다. 「고독」에서 소로는 숲에 들어온 직후 한때 혼자 있음이 불편하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다음 장면은 그 불편함이 사람의 숫자를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주위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의 변화 속에서 달라졌음을 보여 준다.
“나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외롭다고 느끼거나 고독감에 조금이라도 짓눌린 적이 없었다. 그것은 숲에 온 지 몇 주가 지난 때였는데, 한 시간쯤 사람의 가까운 이웃됨이 평온하고 건강한 삶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혼자 있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내 기분에 약간의 이상함이 있음을 알아차렸고, 회복을 미리 내다보는 듯했다. 이런 생각들이 이어지는 동안 잔잔한 비가 내렸고, 나는 갑자기 자연 속에서, 바로 그 빗방울 소리와 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모습 속에서, 너무도 달콤하고 이로운 사귐을 느꼈다. 무한하고 설명할 수 없는 우호로움이 나를 받쳐 주는 공기처럼 한꺼번에 다가와, 사람들과 가까이 사는 데서 얻으리라 생각했던 이점들이 하찮게 느껴졌으며, 그 뒤로는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작은 솔잎 하나하나가 공감으로 펼쳐지고 부풀며 나의 벗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거칠고 쓸쓸하다고 부르는 풍경에도 나와 같은 무엇인가가 있음을 너무도 뚜렷하게 깨달았고, 나와 가장 가까운 혈연이며 가장 인간적인 것이 사람이나 마을 주민은 아니라는 것을 느껴, 다시는 어떤 곳도 낯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Henry David Thoreau, *Walden; or, Life in the Woods* (1854), “Solitude,” paragraph beginning “While I enjoy the friendship of the seasons.”
영어 원문_Thoreau/Solitude)
3. 세네카 — 혼자 있는 시간의 가치는 자신이 자기에게 어떤 동반자인지에 달려 있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경~서기 65년)는 판단과 욕망을 수양하여 외적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탐구한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다. 그는 군중을 떠나는 일만으로 마음이 좋아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욕구와 생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고독은 수양의 자리가 되기도 하고 잘못된 욕망을 키우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Epistulae morales ad Lucilium*(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서한) 제10서한은 수신자를 자기 자신과 함께 있도록 맡길 수 있다는 신뢰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 신뢰에 앞서, 모든 사람이 홀로 있음을 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경고가 놓여 있다. 고독을 권하는 말은 특정한 인격적 성숙에 대한 판단을 포함한다.
“우리는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을 지켜보아, 그가 홀로 있음을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하곤 한다. 분별없는 사람 가운데 자기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 사람은 없다. 그럴 때 그들은 나쁜 계획을 세우고, 남이나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쌓으며, 그릇된 욕망을 꾸민다. 그럴 때 마음은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감추던 것을 드러내고, 대담함을 벼리며, 욕정을 자극하고, 분노를 부추긴다. 결국 고독이 지닌 하나의 이점, 아무에게도 비밀을 맡기지 않고 고발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점조차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사라진다. 그가 스스로를 배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자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아니 오히려 무엇을 확신하는지 보게. 희망은 아직 확실하지 않은 좋은 것의 이름이기 때문이네. 나는 자네가 자네 자신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낫다고 여길 동반자를 찾지 못하겠네.”
Lucius Annaeus Seneca, *Epistulae morales ad Lucilium*,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