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L Archive
WQ038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외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외로움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상태와 정확히 같지 않다. 많은 모임과 대화 속에서도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거나 관계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끼면 외로울 수 있다. 반대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도 의미 있는 연결이 유지된다고 느끼는 사람은 외로움을 적게 경험한다. 관계의 수와 연결의 질, 실제 접촉과 주관적 감각이 서로 다르게 움직인다는 점에서 질문이 생긴다.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외부 조건이 왜 내부의 고립감을 없애지 못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함께 있음의 형태는 다양하다. 직장과 학교에서 매일 사람을 만나도 역할과 성과만 공유하고 개인의 두려움과 관심을 말할 자리가 없을 수 있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갈등을 피하기 위해 중요한 부분을 숨기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다. 소셜 미디어와 단체 채팅은 접촉의 빈도를 높이지만 서로의 몸과 일상을 함께 겪는 경험은 제한될 수 있다. 이주자와 소수자는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설명해야 하는 피로 때문에 다수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돌봄 제공자는 늘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의 필요를 돌봐 줄 관계가 부족할 수 있다. 상실을 겪은 사람은 주변의 지지 속에서도 특정한 한 사람의 부재 때문에 외롭다. 외로움에는 친밀감, 인정, 소속, 상호성, 공동 활동의 부족이 서로 다른 비중으로 들어간다. 속마음을 말하는 관계가 있어도 일상을 함께할 사람이 없어 외로울 수 있고, 공동체에 소속되어도 개인으로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다.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욕구와 거절당할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하면, 관계 속에서도 자신을 감추게 된다. 과거의 배신과 애착 경험, 현재의 우울과 불안, 경쟁적인 환경도 다른 사람의 반응을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관계의 실제 상태와 기대하는 친밀감의 기준 사이의 차이도 외로움을 만든다. 이 질문은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면 된다는 결론이나 혼자 있는 법을 배우라는 방향을 전제하지 않는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연결이 어떤 종류인지, 현재 관계에서 어떤 모습만 드러내고 있는지, 상대와 나 사이에 관심과 책임이 어떻게 오가는지를 이해하려는 물음이다. 사람들 사이의 외로움은 개인의 사회성을 넘어 관계를 조직하는 환경까지 보여 주는 현상이다. 현대의 노동과 주거, 디지털 소통, 문화적 차이, 상실의 경험이 관계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는지까지 드러낸다.

1. 아리스토텔레스 — 같은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는 생각과 활동을 함께 나누는 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는 좋은 삶을 인간의 고유한 활동과 덕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탐구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 자족적이라면 친구가 필요하지 않은지 묻고, 좋은 삶 자체에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활동이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친구는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는 수단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Ēthika Nikomacheia*(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 제9장은 행복한 사람에게도 친구가 필요한 이유를 논한다. 친구를 또 하나의 자기로 보는 논의에 이어, 자신의 살아 있음을 의식하는 기쁨이 친구의 존재를 함께 의식하는 데까지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함께 산다는 말은 물리적 근접보다 말과 생각을 나누는 활동을 가리킨다.

“자기 자신의 존재가 각자에게 바람직하듯, 친구의 존재도 그러하거나 거의 그러하다. 자기 존재가 바람직하다고 보인 것은 자기 안의 좋음을 지각하기 때문이었고, 그러한 지각은 그 자체로 즐겁다. 그러므로 친구의 존재도 함께 의식해야 한다. 이것은 함께 살면서 말과 생각을 나눔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인간에게 함께 산다는 것은 가축처럼 같은 곳에서 풀을 뜯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뜻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극히 행복한 사람에게 존재 자체가 바람직하고, 그것이 본성상 좋고 즐거우며, 친구의 존재도 이와 매우 비슷하다면, 친구는 바람직한 것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자신에게 바람직한 것은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점에서 부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살 사람에게는 덕 있는 친구들이 필요하다.”

Aristotle, *Ēthika Nikomacheia*, IX.9, 1170b6–19; W. D. Ross, trans.

원전의 영어 번역

↑ 질문으로 돌아가기

2. 마르틴 부버 — 서로를 역할과 속성으로만 대하면 많은 접촉 속에서도 만남이 비어 있을 수 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인간의 존재를 관계와 대화 속에서 이해한 유대교 사상가이자 철학자다. 그는 이미 완성된 자아가 나중에 타인을 만난다고 보기보다,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나 자신도 다르게 성립한다고 보았다. 사람을 파악하고 이용하는 방식과 한 존재를 ‘너’로 마주하는 방식의 차이를 설명하려 했다.
*Ich und Du*(나와 너)는 ‘나-그것’과 ‘나-너’라는 두 근원어를 통해 관계의 양식을 구별한다. 제1부의 다음 대목은 사람을 속성의 목록으로 설명하는 것과 온전한 상대와 관계 맺는 것의 차이를 보여 준다. 상대에 대한 지식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너’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한 인간을 나의 너로 마주하고 그에게 근원어 나-너를 말할 때, 그는 사물들 가운데 하나의 사물도 아니며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는 다른 그나 그녀에 의해 한정되고 공간과 시간의 세계망에 기록된 한 점으로서의 그나 그녀가 아니다. 또한 경험하고 서술할 수 있는 하나의 성질, 이름 붙인 속성들의 느슨한 묶음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웃도 이음매도 없이 너이며 하늘의 둘레를 가득 채운다. 그 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다른 것이 그의 빛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선율이 음들로, 시구가 낱말들로, 조각상이 선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 내가 너라고 말하는 인간도 그러하다. 하나의 통일체를 여럿으로 만들려면 그것을 잡아당기고 찢어야 한다. 나는 그에게서 머리카락의 빛깔이나 말의 빛깔이나 선함의 빛깔을 따로 끌어낼 수 있으며, 또 거듭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이미 더 이상 너가 아니다.”

Martin Buber, *Ich und Du* (1923), Erster Teil, paragraph beginning “Stehe ich einem Menschen als meinem Du gegenüber.”

독일어 원문

↑ 질문으로 돌아가기

3. 한나 아렌트 — 타인과 함께 있어도 자신이 공동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인간의 정치적 삶과 전체주의의 조건을 탐구한 정치사상가다. 그는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고 현실을 확인하는 관계가 무너질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 물었다. 외로움도 개인의 기분에 한정하지 않고, 세계와 타인에게서 버려졌다고 경험하는 상태로 분석했다.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전체주의의 기원)의 마지막 장 “Ideology and Terror”(이데올로기와 테러)는 정치적 고립, 혼자 생각하는 고독,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구별한다. 이 구별은 주변의 사람 수만으로 경험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외로움은 고독이 아니다. 고독은 혼자 있음을 요구하지만,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62), Part III, ch. 13, “Ideology and Terror: A Novel Form of Government,” p. 476.

영어 원문

↑ 질문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