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견딜까?
미래는 계획의 대상이면서 본질적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다. 사람은 내일의 약속, 장기적인 관계, 저축과 교육, 건강 관리를 통해 미래가 어느 정도 이어질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질병과 사고, 경제 변화, 타인의 선택은 예상한 경로를 바꾼다. 확실성을 얻고 싶은 마음은 삶을 조직하게 하지만, 완전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계획의 근거를 흔든다.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지적인 사실이 왜 일상의 불안과 통제 욕구, 의미의 문제로 이어지는지가 이 질문의 핵심이다. 불확실성의 모습은 상황마다 다르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건강과 생존이, 계약 만료를 앞둔 노동자에게는 소득과 주거가 걸려 있다. 관계를 시작하는 사람은 상대의 마음과 자신의 변화가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고,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교육과 안전에 관한 선택의 장기적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기후 변화와 정치적 위기는 개인의 계획을 넘어 세대 전체의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창작과 연구, 사업에서는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과 함께 시도할 가능성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같은 미지의 미래가 위협과 여지로 동시에 경험된다. 사람마다 불확실성을 견디는 정도가 다른 이유도 단순한 성격 차이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과거에 예측하지 못한 손실을 겪었거나 경제적 안전망이 적은 사람에게 불확실성은 실제로 더 큰 위험이다. 권한과 정보가 많은 사람은 여러 가능성에 대비할 수 있지만, 정보가 많아질수록 새로운 변수와 책임이 보이기도 한다. 확실성을 약속하는 종교적·정치적 서사, 전문가의 예측, 점술과 데이터 모델은 미지의 미래를 이해할 틀을 제공한다. 이 틀이 판단을 돕는 경우와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우가 함께 존재한다. “견딘다”는 말도 체념, 인내, 열린 기대, 임시적인 판단 등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 계획을 세우는 일과, 확실한 답이 올 때까지 선택을 미루는 일은 미래와 다른 관계를 만든다. 이 질문은 걱정을 줄이는 기법을 찾는 데 앞서 인간이 알 수 없는 시간을 전제로 어떻게 약속하고 책임지고 희망하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미래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과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일부 만든다는 사실이 동시에 참이기 때문에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1. 에픽테토스 — 미래의 결과를 소유하려 하기보다 지금 자신의 판단과 행위를 돌본다
에픽테토스(서기 50년경–135년경)는 노예 신분을 경험한 뒤 인간의 자유를 가르친 스토아 철학자로서, 외부의 운명에 흔들리지 않는 삶의 근거를 자신의 도덕적 선택에서 찾았다. 그는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과 지금 어떤 판단과 행동을 선택할 것인지를 구별해야 한다고 보았다.
“존재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어떤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판단과 충동, 욕구와 회피, 한마디로 우리의 행위인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몸과 재산, 평판과 지위, 한마디로 우리의 행위가 아닌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우리에게 달린 것은 본래 자유롭고 가로막히거나 방해받지 않지만, 우리에게 달리지 않은 것은 약하고 예속되어 있으며 방해받을 수 있고 남의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예속된 것을 자유롭다고 여기고 남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면, 너는 방해받고 슬퍼하며 혼란에 빠지고 신들과 사람들을 탓하게 된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러나 네 것만을 네 것이라고 여기고 남의 것을 실제로 그러하듯 남의 것이라고 여기면, 아무도 너를 강제하거나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누구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너에게 적도 없을 것이다. 너는 해로운 일을 겪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pictetus, *Ἐγχειρίδιον*, 1.1–1.3.
“일들이 네가 원하는 대로 일어나기를 요구하지 말고,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너의 삶은 순조롭게 흐를 것이다.”
Epictetus, *Ἐγχειρίδιον*, 8.1.
2. 데이비드 흄 — 경험을 삶의 안내로 삼되 예측을 필연적 확실성으로 바꾸지 않는다
데이비드 흄(1711–1776)은 인간의 지식과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경험에 근거해 분석한 스코틀랜드 철학자로서,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기대가 논리적 증명과 어떻게 다른지 밝혔다. 그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 반복된 경험과 습관에 기대어 생겨나며, 그 근거의 한계를 이해한다고 해서 일상의 예측과 행동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사실에 관한 모든 추론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기초하는 듯하다. 오직 이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는 기억과 감각의 증거를 넘어설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지금 눈앞에 없는 사실, 가령 친구가 시골이나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을 왜 믿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유를 댈 것이다. 그 이유는 친구에게 받은 편지나 그가 예전에 한 결심과 약속에 대한 지식처럼 또 다른 사실일 것이다. 무인도에서 시계나 다른 기계를 발견한 사람은 그 섬에 한때 사람이 있었다고 결론 내릴 것이다. 사실에 관한 우리의 모든 추론은 이와 같은 성격을 띤다. 여기서는 현재의 사실과 그것에서 추론되는 사실 사이에 연결이 있다고 끊임없이 가정한다. 둘을 묶어 주는 것이 없다면 추론은 전적으로 불확실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분명한 목소리와 이성적인 대화를 들으면 우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인간의 구조와 조직이 낳는 결과이며 그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다른 모든 추론을 분석하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기초함을 알 수 있으며, 그 관계는 가깝거나 멀고, 직접적이거나 나란히 생기는 결과들의 관계일 수 있다. 열과 빛은 불에서 나란히 생기는 결과이며, 한 결과에서 다른 결과를 정당하게 추론할 수 있다.”
David Hume,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IV, Part I, §22.
“그러므로 사실을 확신하게 하는 증거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원인과 결과에 대한 지식에 어떻게 도달하는지 물어야 한다. 나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일반 명제로서 다음을 감히 주장한다. 이 관계에 대한 지식은 어떤 경우에도 선험적 추론으로 얻어지지 않으며, 특정 대상들이 서로 끊임없이 결합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경험에서 전적으로 생겨난다. 타고난 이성과 능력이 아무리 강한 사람에게도 전혀 새로운 대상을 제시하면, 그는 감각적 성질을 아무리 정확히 살펴도 그 대상의 원인이나 결과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담의 이성적 능력이 처음부터 완전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는 물의 유동성과 투명성에서 물이 자신을 질식시키리라는 것을, 불의 빛과 온기에서 불이 자신을 태우리라는 것을 추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대상도 감각에 나타나는 성질만으로 그것을 낳은 원인이나 그것에서 생길 결과를 드러내지 않는다.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성은 실제 존재와 사실에 관한 어떤 추론도 할 수 없다.”
David Hume,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IV, Part I, §23.
“그러므로 습관은 인간 생활의 위대한 안내자다. 오직 이 원리만이 우리의 경험을 유용하게 만들고, 미래에도 과거에 나타났던 것과 비슷한 사건의 흐름을 기대하게 한다. 습관의 영향이 없다면 우리는 기억과 감각에 직접 주어진 것을 넘어서는 모든 사실에 대해 전혀 무지할 것이다. 목적에 맞게 수단을 조정하거나 어떤 결과를 만들기 위해 타고난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도 알지 못할 것이다. 모든 행동과 사유의 주요 부분은 즉시 끝나 버릴 것이다.”
David Hume,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V, Part I, §36의 마지막 문단.
3. 쇠렌 키르케고르 — 불안은 열린 가능성과 자유를 드러내며 결단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 한다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기독교 신앙과 개별자의 실존을 탐구한 덴마크 철학자로서, 인간이 자유로운 가능성 앞에서 경험하는 불안을 죄와 책임의 문제에 연결했다. 그는 불안을 눈앞의 위험에 대한 공포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자신의 가능성을 마주하는 자유의 경험으로 보았다.
“불안은 현기증에 비유할 수 있다. 눈으로 아득한 깊이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현기증을 느낀다. 그러나 그 원인은 무엇인가? 심연만큼이나 그의 눈에도 원인이 있다. 그가 아래를 응시하지 않았다면 어땠겠는가. 이와 같이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정신이 종합을 정립하려 하고 자유가 자신의 가능성을 내려다본 뒤, 붙들 것을 찾으려 유한성을 움켜쥘 때 그것이 생긴다. 이 현기증 속에서 자유는 쓰러진다. 심리학은 그보다 더 나아갈 수도 없고 나아가려 하지도 않는다.”
Søren Kierkegaard, *Begrebet Angest*, 제2장 §2 “Subjektiv Angest”, 현기증의 비유 문단.
4. 붓다 — 변하는 미래를 붙잡으려는 집착을 줄이고 현재의 조건과 행위를 살핀다
불교의 초기 경전 전통은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수행의 중심 문제로 삼으며, 조건에 따라 생긴 것을 영구히 붙잡으려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강조한다. 이 책에서는 무상·괴로움·무아를 지혜로 보는 일을 청정에 이르는 길로 제시하며, 그 통찰이 부지런한 실천과 함께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지혜로 볼 때, 괴로움에서 마음이 떠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지혜로 볼 때, 괴로움에서 마음이 떠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법은 자아가 아니다’라고 지혜로 볼 때, 괴로움에서 마음이 떠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힘써야 할 때 힘쓰지 않고 젊고 강하면서도 나태하며, 생각과 마음이 가라앉아 게으른 사람은 지혜의 길을 찾지 못한다.”
*Dhammapada*, Maggavagga, 277–280게송.
원문 확인 · 277 · 278 · 279 · 280
5. 예수 — 내일을 완전히 확보하려는 염려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돌봄과 오늘의 의를 따른다
기독교 복음서 전통은 인간의 삶을 하느님의 돌봄과 하느님 나라의 요구 안에서 이해하며, 생계에 대한 염려가 삶의 궁극적 주인이 되지 않도록 신뢰와 의로운 실천을 함께 요청한다. 이 책에서는 예수의 산상설교를 통해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염려를 다루면서, 내일의 모든 짐을 오늘 짊어지기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생명을 위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지,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지 염려하지 마라. 생명은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몸은 옷보다 더 중요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훨씬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염려해서 자기 생애의 길이에 한 자라도 보탤 수 있느냐? 또 어찌하여 옷을 염려하느냐? 들의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수고하지도 실을 잣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광을 누린 솔로몬조차 이 꽃 하나처럼 입지 못했다. 오늘 있다가 내일 화덕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신다면, 믿음이 적은 너희에게는 얼마나 더 잘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염려하지 마라. 다른 민족들이 이 모든 것을 추구한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함을 아신다. 먼저 그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마라. 내일은 스스로를 염려할 것이다. 하루에는 그날의 어려움으로 충분하다.”
*Κατὰ Ματθαῖον*, 6:2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