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를 내지 못해도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인가?
현대 사회에서 성과는 능력과 노력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다. 학교의 점수, 직장의 실적, 소득, 생산량, 수상과 자격은 사람을 비교하고 자원과 기회를 배분하는 데 사용된다. 성과를 통해 기여가 인정되고 자신감과 소속감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성과가 사람의 가치 전체를 나타내는 기준이 되면 실업, 질병, 장애, 돌봄, 노화, 실패의 시기를 겪는 사람은 존재 자체가 낮게 평가된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질문은 평가 가능한 결과와 인간의 가치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묻기 때문에 단순한 위로나 자기존중의 문제를 넘어선다.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말 자체도 여러 상황을 포함한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거나 능력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은 경우가 있고, 경기 침체와 차별, 건강 악화 때문에 기회가 제한된 경우가 있다. 어린이와 중증 환자, 노인은 생산적 성과와 관계없이 돌봄을 받으며, 가족을 돌보는 사람의 노동은 중요하지만 시장의 실적으로 기록되지 않을 수 있다. 예술과 연구는 오랜 시간 결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실패한 시도가 이후의 지식에 기여한다. 직장을 잃은 사람은 이전과 같은 능력을 갖고 있어도 사회적 지위와 일상의 관계가 함께 흔들린다. 성과 부재의 원인과 의미는 동일하지 않다. 사람의 가치를 성과와 분리하면 존엄과 권리를 보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노력과 책임,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평가할지가 남는다. 반대로 성과를 가치의 핵심으로 두면 무엇을 성과로 측정하고 누가 기준을 정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시장에서 높은 보상을 받는 일이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기여인지, 측정되지 않는 돌봄과 관계 유지가 왜 낮게 평가되는지 논쟁이 생긴다. 또한 성과는 개인의 노력과 교육, 건강, 운, 타인의 지원에 함께 의존한다. 성공한 사람의 가치가 더 높다는 결론은 결과에 관여한 조건을 개인의 속성으로 바꿀 수 있다. 이 질문은 성과가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거나 실패의 책임을 지우는 방향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성과가 능력과 기여에 관해 알려 주는 부분, 인간의 기본적 존중과 권리를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 성과 기준이 특정한 노동과 삶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방식을 함께 살핀다. 일을 잘하는 사람, 의존적 돌봄을 받는 사람, 아직 가능성을 펼치지 못한 사람을 어떤 언어로 평가할지에 따라 사회의 제도와 개인의 자기 이해가 달라진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존엄, 사랑받을 자격, 사회적 기여, 능력 가운데 무엇을 뜻하는지를 묻는 것이 이 질문의 출발점이다.
1. 임마누엘 칸트 — 사람의 존엄은 성과나 시장가격으로 교환할 수 없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사람을 존중해야 할 이유를 사회적 유용성이나 성공의 크기와 구별하여 설명하려 했다. 그는 이성적 존재가 스스로 목적을 세우고 도덕법칙을 부여할 수 있다는 데서 존엄의 근거를 찾았으며, 그런 존재를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논의는 성과 평가와 인격에 대한 존중이 서로 다른 기준을 따른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과 일반적으로 모든 이성적 존재는 이런저런 의지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단순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으로 존재하며, 자신을 향한 행위에서든 다른 이성적 존재를 향한 행위에서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여겨져야 한다. 성향의 모든 대상은 조건적인 가치만을 가진다. 성향과 거기에 근거한 필요가 없다면 그 대상에는 가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요의 원천인 성향 자체는 그것을 그 자체로 원할 만큼 절대적인 가치를 갖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 모든 이성적 존재의 일반적인 바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대상의 가치는 언제나 조건적이다. 존재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자연에 근거하더라도, 이성이 없는 존재는 수단으로서 상대적인 가치만을 가지므로 사물이라 불린다. 반면 이성적 존재는 그 본성이 이미 그 자체로 목적, 곧 단순한 수단으로만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구별하므로 인격이라 불리며, 그런 한에서 모든 자의적인 선택을 제한하고 존경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이들은 우리의 행위 결과로 존재할 때 우리에게 가치를 가지는 주관적 목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인 객관적 목적이며, 단순한 수단으로 봉사하게 할 다른 목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목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디에서도 절대적 가치를 가진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가 조건적이고 따라서 우연적이라면 이성은 어디에서도 최고의 실천 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Immanuel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제2절, 이성적 존재를 목적 그 자체로 규정하는 문단.
“그러므로 최고의 실천 원리와 인간 의지에 관한 정언명령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에 필연적으로 누구에게나 목적인 것의 표상에서 의지의 객관적 원리를 이루고, 따라서 보편적 실천법칙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원리의 근거는 이렇다. 이성적 본성은 그 자체로 목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런 한에서 이것은 인간 행위의 주관적 원리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 역시 나에게도 적용되는 동일한 이성의 근거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생각한다. 따라서 이것은 동시에 객관적 원리이며, 최고의 실천적 근거로서 의지의 모든 법칙은 여기에서 도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실천 명령은 이와 같다. ‘너 자신의 인격에서든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든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않도록 행위하라.’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Immanuel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제2절, 인간성 정식이 제시되는 문단.
“목적들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가격을 가지거나 존엄을 가진다. 가격을 가진 것은 그것과 동등한 다른 것으로 대신될 수 있다. 반대로 모든 가격을 넘어서는 것, 따라서 어떤 등가물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존엄을 가진다. 일반적인 인간의 성향과 욕구에 관계하는 것은 시장가격을 가진다. 어떤 욕구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일정한 취향, 곧 우리 마음의 능력이 아무 목적 없이 유희하는 데서 느끼는 만족에 맞는 것은 취향의 가격을 가진다. 그러나 어떤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게 하는 조건은 단지 상대적인 가치, 곧 가격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가치, 곧 존엄을 가진다. 이제 도덕성은 이성적 존재가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오직 도덕성을 통해서만 이성적 존재는 목적들의 나라에서 입법하는 구성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성과, 도덕적일 수 있는 한에서의 인간성은 존엄을 지닌다.”
Immanuel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제2절, 목적들의 나라에서 가격과 존엄을 구별하는 연속 세 문단.
2. 붓다 — 성취에 앞서 고통을 두려워하고 삶을 소중히 여기는 존재를 살핀다
팔리어로 전승된 법구경은 불교의 가르침을 짧은 게송으로 모은 경전으로, 행위가 자신과 타자에게 가져오는 괴로움을 살피고 해침을 삼가는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는 다른 존재도 자신처럼 폭력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을 비추어 보며, 죽이거나 죽이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삶을 보호할 이유를 생산성과 성취에서 찾는 대신 고통을 겪는 존재의 처지에서 출발하는 관점이다.
“모두가 폭력을 두려워한다.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신을 견주어 생각하고, 죽이지도 말고 죽이도록 하지도 말라.”
*Dhammapada*, Daṇḍavagga, 129.
“모두가 폭력을 두려워한다. 모두에게 삶은 소중하다. 자신을 견주어 생각하고, 죽이지도 말고 죽이도록 하지도 말라.”
*Dhammapada*, Daṇḍavagga, 130.
3. 카를 마르크스 — 성과가 인간의 가치를 재단하는 노동과 소유의 관계를 비판한다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 비판가로서, 인간의 노동이 만들어 낸 부와 권력이 오히려 노동자를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를 분석하려 했다. 그는 노동자의 산물이 커진다는 사실과 노동자가 자신의 삶과 활동을 더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과가 부족한 개인의 마음가짐만 묻기보다 성과를 누가 소유하고 어떤 기준으로 인간을 평가하는지 살펴야 한다.
“노동자는 더 많은 부를 생산할수록, 그의 생산이 힘과 규모에서 커질수록 더욱 가난해진다. 노동자가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 낼수록 그 자신은 더욱 값싼 상품이 된다. 사물 세계의 가치 증대는 인간 세계의 가치 하락과 정비례한다. 노동은 상품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노동자도 상품으로 생산하며, 일반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바로 그 비율로 그렇게 한다. 이 사실은 노동이 생산한 대상, 곧 노동의 산물이 노동자와 맞서는 낯선 존재로, 생산자에게서 독립된 힘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의 산물은 대상 안에 구현되어 물질이 된 노동이며, 곧 노동의 대상화다. 노동의 실현은 그 대상화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의 조건 아래에서 노동의 이러한 실현은 노동자에게 현실의 상실로,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 전유는 소외와 낯섦으로 나타난다.”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제1초고, 「소외된 노동」, 노동자가 생산한 대상과 마주하는 관계를 설명하는 연속 대목.
“첫째, 노동은 노동자에게 외적인 것이다. 즉 노동은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다고 느끼고, 자유로운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몸을 소진하며 정신을 황폐하게 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밖에서야 자신에게 속한다고 느끼며 노동 안에서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다고 느낀다. 일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듯하지만, 일할 때에는 집에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므로 그의 노동은 자발적이지 않고 강제된 노동이다. 그것은 필요 자체의 충족이 아니라 노동 밖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 낯섦은 신체적이거나 다른 강제가 없어지자마자 노동을 역병처럼 피한다는 데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외적인 노동, 인간이 자신을 소외시키는 노동은 자기희생과 고행의 노동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의 외적 성격은 그것이 노동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며, 노동자가 그 안에서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속한다는 데서 드러난다. 종교에서 인간의 상상력과 머리와 마음의 자발적 활동이 개인에게서 독립하여 낯선 신적이거나 악마적인 활동으로 그에게 작용하듯이, 노동자의 활동도 자기 자신의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속하며 자기 자신의 상실이다.”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제1초고, 「소외된 노동」, 노동의 외적 성격을 설명하는 문단.
4. 마르틴 루터 — 받아들여짐은 업적의 보상이 아니며 선행은 은총의 열매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로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근거를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과 믿음에서 찾으려 했다. 그는 선행을 쌓아 구원을 얻는다는 순서를 뒤집어,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행위를 한다고 보았다. 내적인 자유와 타인을 향한 봉사는 이 신학 안에서 함께 이해된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무엇이며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얻어 주신 자유가 어떠한지 깊이 알기 위해, 바울이 많이 논한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 두 결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은 만물 위에 선 자유로운 주인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Martin Luther,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1, 서두와 두 명제.
“스물셋째, 그러므로 다음 두 말은 참이다. 선하고 경건한 행위가 결코 선하고 경건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경건한 사람이 선하고 경건한 행위를 한다. 악한 행위가 결코 악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악한 행위를 한다. 따라서 언제나 사람은 모든 선한 행위에 앞서 선하고 경건해야 하며, 선한 행위는 경건하고 선한 사람에게서 뒤따라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열매가 나무를 맺는 것도 아니고 나무가 열매 위에서 자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오히려 나무가 열매를 맺고 열매가 나무에서 자란다. 나무가 열매보다 먼저 있어야 하고 열매가 나무를 좋거나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열매를 만들어 내듯이, 사람 역시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경건하거나 악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의 행위가 그를 좋거나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를 한다.”
Martin Luther,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23, 선행과 사람의 관계를 나무와 열매에 비유하는 대목.
“그러므로 행위는 누구도 의롭게 하지 못하고, 사람은 행위하기 전에 먼저 의롭게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통한 순전한 은총에서 오직 믿음만이 그 사람을 충분히 의롭게 하고 구원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을 위해 어떤 행위나 계명도 필요하지 않다. 그는 모든 계명에서 자유로우며, 순전한 자유에서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거저 하고, 그것으로 자기 이익이나 구원을 구하지 않는다. 믿음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미 충만하고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그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선한 행위를 한다.”
Martin Luther,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23, 믿음과 행위의 순서를 정리하는 마지막 대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