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원하는 것을 하는 능력인가, 욕망에 끌려가지 않는 능력인가?
자유는 흔히 원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상태로 이해된다. 이동하고 말하고 직업과 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면 자유롭다고 느끼기 어렵다. 그러나 욕망이 중독, 두려움, 광고, 집단의 기대에 강하게 이끌릴 때에는 선택지가 많아도 자신이 삶을 주도한다는 감각이 약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자유는 외부의 간섭이 없는 상태인지, 자신의 욕망을 성찰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인지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두 의미는 종종 함께 가지만, 한쪽을 넓히는 일이 다른 쪽을 약하게 하는 상황에서 질문이 생긴다. 원하는 것을 할 자유는 정치적·사회적 권리와 직접 연결된다. 국가가 발언과 이동을 제한하거나 가족이 진로와 결혼을 강제할 때, 욕망의 성숙 여부를 묻기 전에 외부 억압이 문제로 나타난다. 반면 도박이나 약물, 강박적 소비에서는 당사자가 강하게 원한다고 말해도 그 욕망이 장기적인 가치와 충돌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를 계속 보고 싶은 마음, 과로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특정한 몸을 만들고 싶은 욕망도 개인의 선택과 사회적 설계가 섞여 있다. 종교적 수행이나 절제는 욕망에서 거리를 만드는 자유로 경험될 수 있지만, 공동체의 강요와 죄책감 속에서 이루어지면 외부 통제의 모습도 가진다. 욕망을 따르지 않는 능력을 자유의 중심에 두면 누가 성숙한 욕망과 잘못된 욕망을 판단할지가 문제가 된다. 국가나 전문가, 가족이 개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선택을 제한할 수 있고,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을 자기통제가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반대로 간섭 없는 선택만 강조하면 기업과 플랫폼이 욕망을 형성하는 과정, 빈곤과 교육 격차가 선택지를 달리 만드는 현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즉흥적인 욕망과 오래 숙고한 가치도 항상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며, 사람은 욕망을 따라 경험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배우기도 한다. 이 질문은 두 자유 중 하나를 정답으로 고르는 문제가 아니다. 외부에서 가능한 선택의 범위, 욕망이 형성된 과정, 충동과 장기적 가치의 관계, 선택을 되돌릴 가능성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묻는다. 같은 행동도 억압에서 벗어난 표현일 수 있고 다른 힘에 끌려간 결과일 수 있다. 자유를 기회와 자기통제, 관계와 제도, 몸의 능력으로 나누어 살펴볼 때 왜 “원하는 대로 하기”와 “욕망에 끌려가지 않기”가 서로 다른 자유의 모습을 제시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1. 존 스튜어트 밀 — 자신의 욕망과 판단으로 삶을 시험할 사회적 자유가 필요하다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로서, 국가의 강제뿐 아니라 다수의 관습과 여론이 개인의 판단과 개성을 위축시키는 문제를 탐구했다. 그는 사람이 자신의 관찰과 감정, 판단을 사용해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경험을 통해 수정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선택을 강제로 제한하려면 타인에게 가하는 해악이라는 근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세상이나 자신이 속한 일부 사회로 하여금 자기 삶의 계획을 대신 선택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원숭이 같은 모방 능력 외에는 다른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자기 계획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사용한다. 그는 보기 위해 관찰하고, 앞일을 내다보기 위해 추론과 판단을 사용하며, 결정을 위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 활동하고, 결정하기 위해 식별하며, 일단 결정한 뒤에는 숙고한 결정을 지키기 위해 굳은 의지와 자제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판단과 감정에 따라 결정하는 행동의 몫이 클수록 그는 이러한 능력을 그만큼 더 많이 필요로 하고 사용한다. 이런 능력을 전혀 쓰지 않고도 어떤 좋은 길로 인도되고 해를 피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인간으로서 그의 상대적 가치는 어떻게 되는가?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만이 아니라, 그것을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인간의 삶이 완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데 정당하게 쓰이는 여러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분명 인간 자신이다. 집을 짓고 곡식을 기르고 전쟁을 치르고 재판을 하며 교회를 세우고 기도하는 일까지 인간의 모습을 한 자동기계로 수행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자연이 만들어 낼 수 있고 앞으로 만들어 낼 인간의 빈약한 표본에 불과하더라도, 현재 더 문명화된 지역에 사는 남녀를 그런 자동기계와 바꾸는 것은 큰 손실일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모형대로 만들고 정해진 일을 정확히 수행하도록 설정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는 내적 힘의 경향에 따라 사방으로 자라고 발달해야 하는 나무다.”
John Stuart Mill, *On Liberty*, Chapter III, “Of Individuality, as One of the Elements of Well-Being”, 자기 삶의 계획과 인간 본성의 발달을 설명하는 문단.
2. 붓다 — 갈애가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데서 해방을 찾는다
팔리어로 전승된 법구경은 불교의 가르침을 짧은 게송으로 모은 경전으로, 행위와 마음의 훈련을 통해 괴로움의 조건을 이해하고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는 원하는 대상을 얻는 능력만으로 마음이 자유로워지지는 않으며, 대상을 붙잡으려는 갈애가 슬픔과 두려움을 낳는다고 설명한다. 한 사람의 논문처럼 집필된 저작이 아니라 전승과 편집을 거친 경전이므로, 이 게송을 특정 시점의 개인적 발언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갈애에서 슬픔이 생긴다. 갈애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갈애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두려움이 어디에서 생기겠는가?”
*Dhammapada*, Piyavagga, 216.
3. 임마누엘 칸트 — 보편적 법칙으로 승인할 수 있는 원칙을 스스로 따르는 것이 자유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도덕적 의무가 개인의 기호나 외부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타당할 수 있는 근거를 탐구했다. 그는 욕망을 충족할 수 있다는 사실과 의지가 자율적이라는 사실을 구별하고, 의지가 자신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법칙을 부여하는 데서 자유의 적극적 의미를 찾았다.
“의지의 자율은 의지가 의욕의 대상들의 모든 성질과 독립하여 자기 자신에게 법이 되는 성질이다. 따라서 자율의 원리는 자신의 선택의 준칙들이 같은 의욕 안에서 동시에 보편적 법칙으로 포함될 수 있도록만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 실천 규칙이 명령이며, 곧 모든 이성적 존재의 의지가 그것에 조건으로서 필연적으로 구속된다는 사실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개념들의 단순한 분석으로 증명될 수 없다. 그것은 종합명제이기 때문이다. 대상에 관한 인식을 넘어 주체, 곧 순수 실천이성의 비판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명령하는 이 종합명제는 완전히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하지만, 이 작업은 현재의 절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말한 자율의 원리가 도덕의 유일한 원리라는 것은 도덕성의 개념을 단순히 분석함으로써 충분히 밝힐 수 있다. 그 분석을 통해 도덕성의 원리는 정언명령이어야 하며, 정언명령은 바로 이 자율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명령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Immanuel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제2절, 「도덕성의 최고 원리로서 의지의 자율」, 첫 문단.
“자연적 필연성은 작용하는 원인들의 타율이었다. 모든 결과는 어떤 다른 것이 작용하는 원인을 인과 작용으로 규정한다는 법칙에 따라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지의 자유가 자율, 곧 자기 자신에게 법이 되는 의지의 성질 외에 달리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의지가 모든 행위에서 자기 자신에게 법이라는 명제는, 자기 자신을 보편적 법칙으로서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한다는 원리를 나타낸다. 이것은 바로 정언명령의 정식이며 도덕성의 원리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지와 도덕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Immanuel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제3절, 「자유의 개념은 의지의 자율을 설명하는 열쇠다」, 둘째 문단 후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