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 선택도 나의 선택인가?
선택은 고립된 순간에 순수한 의지로 생기지 않는다. 습관은 의식적인 판단 전에 행동을 시작하게 하고, 환경은 어떤 선택을 눈에 띄고 쉽게 만들며 다른 가능성을 보이지 않게 한다. 배고플 때 눈앞에 놓인 음식, 휴대전화의 알림, 자동 갱신되는 서비스, 통근 경로와 주변 상점은 반복적인 행동의 방향을 만든다. 그럼에도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내가 선택했다”고 말한다. 행동이 습관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과 개인의 선택이라는 설명이 어떻게 함께 성립하는지가 이 질문의 핵심이다. 습관의 영향은 정도와 방식이 다르다. 오랫동안 반복한 운전 경로처럼 거의 생각 없이 이루어지는 행동이 있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특정 음식이나 술을 찾는 것처럼 감정 조절과 결합된 행동이 있다. 중독에서는 강한 갈망과 금단이 선택의 범위를 좁히며, 수면 부족과 우울은 계획하고 실행하는 능력 자체에 영향을 준다. 환경도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가난한 지역의 식품과 교통 선택,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건물, 직장에서 기본값으로 설정된 근무 방식은 가능한 행동의 목록을 달리 만든다. 온라인 플랫폼은 추천과 보상 구조를 통해 머무는 시간과 관심의 방향을 설계한다.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선택이 사라졌다고 말하면 사람 사이의 책임과 약속을 설명하기 어렵다. 반대로 모든 행동을 자유로운 선택으로 보면 설계된 환경과 불평등한 조건, 몸과 뇌의 제약이 가려진다. 같은 환경에서도 사람마다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은 개인적 차이를 보여 주지만, 일부 사람이 거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영향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습관도 과거의 선택이 축적된 결과일 수 있고, 어린 시절이나 강제된 환경에서 형성된 것일 수 있다. 선택의 주체성과 조건의 힘을 어느 범위까지 인정할지에 따라 책임의 의미가 달라진다. 실제 사례에서 이 긴장은 건강, 소비, 노동, 정치 참여에 걸쳐 나타난다. 야간 근무자가 불규칙한 식사와 수면을 반복할 때 생활 방식과 근무 구조가 함께 작용한다. 자동 결제 서비스를 해지하지 않은 행동에는 의사, 망각, 복잡한 절차가 섞여 있다. 가족의 직업을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선택에는 애정과 능력, 기대와 정보의 제한이 모두 들어 있을 수 있다. 이 질문은 행동을 자유 또는 강제 중 하나로 분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선택했다고 부르는 과정에 습관·몸·제도·공간·타인의 설계가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는지를 이해하려는 물음이다.
1. 존 듀이 — 습관과 환경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선택의 주체성이 자란다
존 듀이(1859–1952)는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교육사상가로서, 인간의 행위를 고립된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몸의 습관과 사회적 환경이 함께 만들어 가는 활동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는 이미 형성된 습관이 선택의 범위를 조직하지만, 문제가 생긴 상황을 숙고하고 환경을 바꾸는 활동을 통해 더 지적인 선택이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습관은 호흡이나 소화 같은 생리적 기능과 비교해 보면 유익하다. 물론 생리적 기능은 불수의적인 반면 습관은 획득된다. 그러나 여러 목적에서 이 차이가 중요하더라도, 습관이 여러 면에서 생리적 기능과 비슷하며 특히 유기체와 환경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가려서는 안 된다. 호흡은 폐의 일인 만큼 공기의 일이며, 소화는 위 조직의 일인 만큼 음식의 일이다. 시각에는 눈과 시신경이 관여하는 것만큼 확실하게 빛도 관여한다. 걷기에는 다리뿐 아니라 땅도 관여하며, 말하기에는 발성기관뿐 아니라 물리적 공기와 인간의 동료 및 청중도 필요하다. 우리는 ‘기능’이라는 말을 생물학적 용법에서 수학적 용법으로 옮겨, 호흡과 소화 같은 자연적 작용이나 말하기와 정직 같은 획득된 작용이 사람의 함수인 만큼이나 주변 환경의 함수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은 환경이 유기적 구조나 획득된 성향을 통해 수행하는 일이다. 어떤 조건에서는 연못을 일렁이게 하거나 건물을 무너뜨리는 바로 그 공기가 다른 조건에서는 피를 정화하고 생각을 전달한다. 결과는 공기가 무엇에 작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사회적 환경은 타고난 충동을 통해 작용하고, 말하기와 도덕적 습관이 드러난다. 행위를 그것이 직접 나오는 사람에게 통상 귀속하는 데에는 구체적이고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정한 귀속을 배타적 소유라는 믿음으로 바꾸는 것은 호흡과 소화가 인간의 몸 안에서 완결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오해를 낳는다. 도덕적 논의를 위한 합리적 토대를 얻으려면, 기능과 습관은 환경을 사용하고 자기 활동 안에 받아들이는 방식이며 그 과정에서 환경도 기능과 습관만큼 확실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John Dewey, *Human Nature and Conduct*, Part I, Section I, “Habits as Social Functions”, 첫 문단.
2. 아리스토텔레스 — 반복된 행동이 선택하는 사람의 성품을 형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인간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좋은 판단과 행위가 가능해지는 성품의 형성 과정을 탐구했다. 그는 성품이 태어날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반복과 교육을 통해 길러지며, 그렇게 형성된 성향이 이후의 감정과 선택을 이끈다고 보았다.
“덕에는 지성적 덕과 품성적 덕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 지성적 덕은 그 발생과 성장의 대부분을 가르침에 의존하므로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품성적 덕은 습관에서 생겨나며, 그 이름도 ‘습관’이라는 말에서 조금 변형되어 나온 것이다. 이로부터 품성적 덕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에게 본성적으로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본성적으로 있는 것은 어느 것도 다른 방식으로 습관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본성적으로 아래로 움직이는 돌은 누군가 만 번을 위로 던지며 습관을 들이려 해도 위로 움직이는 데 익숙해지지 않으며, 불도 아래로 움직이게 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도 본성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습관 들일 수 없다. 따라서 덕은 본성에 의해 생기는 것도 본성에 거슬러 생기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본성상 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습관을 통해 완성된다.”
Aristoteles, *Ἠθικὰ Νικομάχεια*, II.1, 1103a14–26.
“또한 우리에게 본성적으로 주어지는 것에서는 먼저 그 능력을 얻고 나중에 그 활동을 수행한다. 이는 감각에서 분명하다. 우리는 여러 번 보거나 여러 번 들어서 감각을 얻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했으며 사용해서 갖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덕은 다른 기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먼저 실제로 행함으로써 얻게 된다. 배운 뒤 해야 할 일을 우리는 그것을 해 봄으로써 배우기 때문이다. 집을 지음으로써 건축가가 되고, 리라를 연주함으로써 리라 연주자가 된다. 이와 같이 정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절제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며, 용감한 행동을 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된다.”
Aristoteles, *Ἠθικὰ Νικομάχεια*, II.1, 1103a26–1103b2.
“도시국가에서 일어나는 일도 이를 증언한다. 입법자들은 시민들에게 습관을 길러 줌으로써 그들을 훌륭하게 만든다. 이것이 모든 입법자의 뜻이며, 이 일을 잘하지 못하는 입법자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좋은 정체와 나쁜 정체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Aristoteles, *Ἠθικὰ Νικομάχεια*, II.1, 1103b2–6.
3. 바뤼흐 스피노자 — 선택의 원인을 이해할수록 수동성에서 벗어나 더 능동적으로 행위한다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는 네덜란드의 철학자로서, 인간을 자연의 인과 질서 안에 놓고, 욕망과 감정에 이끌리는 사람이 어떻게 더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의식한다는 사실만으로 자유가 성립하지 않으며, 자신을 움직이는 원인을 적절하게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수동적 정념에서 능동적 행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이 부 정리 17의 주석에서 오류가 어떻게 인식의 결핍에 있는지 설명했지만, 이를 더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겠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착각하며, 이 의견은 오직 그들이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면서 자신을 결정하는 원인은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그들의 자유 관념이란 자기 행동의 원인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 의지에 달려 있다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아무 관념도 갖고 있지 않은 말에 불과하다. 의지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지는 모두가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안다고 떠벌리며 영혼의 자리와 거처를 꾸며 내는 사람들은 대개 웃음이나 메스꺼움을 일으킬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양을 바라볼 때 그것이 우리에게서 약 200피트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데, 이 오류는 그 상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상상하는 동안 태양의 실제 거리와 이 상상의 원인을 모른다는 데 있다.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가 넘는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가까이 있다고 상상할 것이다. 우리가 태양을 그처럼 가깝게 상상하는 까닭은 그 실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몸이 태양의 영향을 받는 한에서 우리 몸의 변용이 태양의 본질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Benedictus de Spinoza, *Ethica*, II, propositio 35, scholium.
“정리 3. 수동적 정념인 감정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형성하는 순간 수동적 정념이기를 그친다. 증명. 수동적 정념인 감정은 혼란된 관념이다(감정의 일반적 정의에 의해). 그러므로 우리가 그 감정에 대해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형성한다면, 이 관념은 정신에만 관계하는 한에서 감정 자체와 이성적으로만 구별될 것이다(제2부 정리 21과 그 주석에 의해). 따라서 감정은 수동적 정념이기를 그칠 것이다(제3부 정리 3에 의해). 이것으로 증명되었다. 따름정리. 그러므로 감정은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질수록 그만큼 더 우리의 능력 안에 들어오고, 정신은 그 감정에 대해 덜 수동적이 된다.”
Benedictus de Spinoza, *Ethica*, V, propositio 3, demonstratio et corollari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