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기대하는 성별 역할과 내가 느끼는 나가 다를 때 어떻게 살아갈까?
사회는 성별에 따라 어울리는 외모와 말투, 감정 표현, 직업, 가족 역할을 미리 예상한다. 남성에게는 경쟁과 독립을, 여성에게는 돌봄과 온화함을 기대하는 규범이 문화와 세대마다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개인은 태어날 때 부여된 성별, 자신이 느끼는 성별 정체성, 선호하는 표현 방식, 실제로 맡은 사회적 역할 사이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요소들이 맞아떨어질 때에는 규범이 잘 보이지 않지만, 어긋날 때에는 일상의 행동과 관계 하나하나가 설명과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질문은 개인의 내면만 다루지 않고 몸, 제도, 언어, 안전, 소속이 함께 얽힌 문제가 된다. 충돌은 성별 정체성의 차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남성으로 자신을 이해하면서도 돌봄을 삶의 중심에 두거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권력과 경쟁이 강한 역할을 원하는 사람도 사회적 기대와 긴장을 겪는다.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인 사람은 이름, 호칭, 의료, 법적 문서, 화장실과 같은 제도적 장면에서 자신이 느끼는 나와 타인이 분류하는 나의 차이를 경험한다. 가정에서는 부모나 배우자가 기대하는 역할이, 직장에서는 채용과 승진의 관행이, 종교 공동체에서는 의례와 지도자 역할의 기준이 각각 다른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 공간에서 가능한 표현이 다른 공간에서는 위험해지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는 자기표현과 관계 유지, 진정성과 안전,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규범이 서로 긴장한다. 자신이 느끼는 모습을 드러내면 소속과 생계가 흔들릴 수 있고, 기대에 맞추면 갈등을 줄이면서도 자기 경험이 가려질 수 있다. 사회적 역할을 완전히 거부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억압의 통로인 동시에 인정과 돌봄, 전통과 관계를 조직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이 느끼는 나 역시 문화적 언어와 역사 속에서 이해되므로, 순수하게 사회 바깥의 자아를 상정하기도 어렵다. 시대와 장소가 바뀌면 같은 행동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도 질문을 복잡하게 만든다. 따라서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물음은 한 가지 표현 방식을 선택하라는 요구로 축소되지 않는다. 자신이 불편함을 느끼는 지점이 정체성, 역할, 타인의 평가, 신체 경험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 각 관계와 제도가 어떤 가능성과 위험을 만드는지도 질문에 포함된다. 사회적 성별 규범과 개인의 자기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충돌하고 겹치는지, 그 충돌이 삶의 선택과 관계, 안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할 때 이 질문이 왜 중요한지 드러난다.
1. 존 스튜어트 밀 — 성별 역할을 본성으로 단정하기 전에 자유롭게 선택할 조건을 확보해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로서, 개인의 자유와 능력의 발달을 가로막는 관습과 제도가 정당한 근거를 갖는지 물었다. 그는 종속된 조건에서 길러진 성향을 곧바로 타고난 본성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보았다. 어떤 일을 배우고 선택할 기회가 성별에 따라 다르게 주어졌다면, 그 뒤에 관찰되는 차이에는 교육과 경제적 의존, 칭찬과 처벌의 영향이 들어 있다. 성별에 맞는 삶을 미리 정하기에 앞서 개인이 다른 가능성을 실제로 시험할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출발점이다.
“두 성의 본성이 현재의 기능과 지위에 알맞게 되어 있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상식과 인간 정신의 구조라는 근거 위에서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이 지금까지 오직 현재와 같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관찰되어 온 한, 두 성의 본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으며 알 수도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나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있었거나, 남성과 여성이 함께 살면서도 여성이 남성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사회가 있었다면, 각 성의 본성에 내재할 수 있는 정신적·도덕적 차이에 관해 어떤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여성의 본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대단히 인위적인 것이다. 어떤 방향에서는 강제로 억압하고, 다른 방향에서는 부자연스럽게 자극한 결과다. 다른 어떤 종속 집단도 지배자와의 관계 때문에 본래의 균형에서 이처럼 철저히 성격이 뒤틀린 적은 없었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정복당한 민족이나 노예 집단은 어떤 점에서는 더 강하게 억압되었을지라도, 쇠발굽에 짓밟혀 없어지지 않은 부분은 대체로 그대로 두었고,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발달하도록 놓아두면 자신의 법칙에 따라 발달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에는 그 본성의 일부 능력을 지배자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온실과 난방 재배하듯 계속 길러 왔다. 그래서 전체 생명력의 어떤 산물은 이 뜨거운 분위기와 적극적인 돌봄과 물주기 속에서 무성하게 자라 크게 발달한 반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싹은 겨울 바깥에 놓여 그 둘레에 일부러 얼음을 쌓아 두었기 때문에 성장이 위축되고, 어떤 것은 불에 타 사라진다. 그런데도 분석하지 않는 정신 특유의, 자기 손으로 만든 결과를 알아보지 못하는 태도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자라게 만든 나무가 저절로 그런 식으로 자라며, 한쪽 절반을 증기탕에 두고 다른 절반을 눈 속에 두지 않으면 죽어 버릴 것이라고 태연히 믿는다. 삶과 사회 제도에 관한 사유와 근거 있는 의견의 형성을 가로막는 모든 어려움 가운데, 지금 가장 큰 것은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는 영향들에 대해 인류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John Stuart Mill, *The Subjection of Women* (1869), Ch. I, pp. 38–40. [원문 확인](https://www.gutenberg.org/files/27083/27083-h/27083-h.htm)
2. 시몬 드 보부아르 — 사회가 형성한 여성의 역할을 검토하고 자신의 삶을 기획할 자유를 넓혀야 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작가로서,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인간이 성별에 따라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는 조건을 탐구했다. 그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생물학적 사실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몸에 의미를 부여하는 교육·노동·가족·문화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여성은 자신의 계획을 세우고 세계에 참여할 수 있지만, 남성을 기준으로 정의되는 ‘타자’의 자리에 고정될 수 있다. 사회적 역할과 자기 경험의 충돌을 이해하려면 개인의 선택과 함께 그 선택을 허용하거나 가로막는 상황을 살펴야 한다.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생물학적·심리학적·경제적 운명도 인간 사회에서 여성이 취하는 모습을 결정하지 않는다. 이 중간적 산물, 곧 남성과 거세된 존재 사이에서 여성적이라고 규정되는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문명 전체다.”
Simone de Beauvoir, *Le Deuxième Sexe*, tome II, première partie, chapitre I « Enfance », 서두의 연속된 세 문장. [본문 확인](https://files.libcom.org/files/1949_simone-de-beauvoir-the-second-sex.pdf#page=330)
3. 주디스 버틀러 — 성별 규범이 반복되는 방식을 드러내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주디스 버틀러(1956~)는 미국의 철학자로서, 사회가 어떤 사람을 이해 가능한 주체로 인정하고 어떤 삶을 규범 밖으로 밀어내는지 젠더와 권력의 관계에서 탐구해 왔다. 그는 젠더의 안정된 본질이 행위에 앞서 주어지기보다, 엄격한 규범 아래 되풀이되는 몸짓과 말, 행동을 통해 그런 본질이 있는 듯한 효과가 생긴다고 보았다. 이를 수행성이라고 부른다. 반복은 개인이 마음대로 고르는 연기와 다르며, 어긋나는 표현에는 실제 제재가 따를 수 있다. 동시에 규범은 반복되어야 유지되므로 재해석과 변형의 가능성도 갖는다.
“젠더는 몸의 반복된 양식화, 곧 매우 엄격한 규제 틀 안에서 반복되는 일련의 행위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굳어져 실체의 외양, 자연적인 존재 방식의 외양을 만들어 낸다.”
Judith Butler, *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Ch. 1, §vi, 1999 ed., pp. 43–44. [본문 확인](https://selforganizedseminar.wordpress.com/wp-content/uploads/2011/07/butler-gender_trouble.pdf#page=78)
4. 붓다 — 성별에 관한 통념이 지혜와 수행의 가능성을 제한하게 해서는 안 된다
*Somā Sutta* (소마 경)는 초기불교의 비구니 소마와 수행을 방해하는 마라의 문답을 통해, 성별이 깨달음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묻는 경전이다. 이 책에서는 여성이 높은 수행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마라의 말에 소마가 집중과 지혜, 법에 대한 통찰을 근거로 답한다. 소마는 이 경전의 대화자로 등장하며 생몰년은 확인되지 않는다. 문답의 초점은 성별에 따른 모든 경험의 차이를 없애는 데 있지 않고, 여성이라는 분류에서 수행 능력의 열등함을 끌어내는 추론과 ‘나는 무엇이다’라는 집착에 있다.
“현자들이 도달하기도 어려운 그 경지는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지닌 여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Saṃyutta Nikāya*, Bhikkhunīsaṃyutta, 5.2, *Somā Sutta*, 마라의 게송. [원문·본문 확인](https://suttacentral.net/sn5.2/en/sujato)
“마음이 잘 집중되어 있고, 올바르게 법을 보아 지혜가 한결같이 이어지는 사람에게 여성이라는 사실이 무슨 차이를 만들겠는가? ‘나는 여자다’, ‘나는 남자다’, 또는 ‘나는 무엇이다’라는 생각을 품는 사람에게나 마라가 말을 걸 수 있으리라.”
*Saṃyutta Nikāya*, Bhikkhunīsaṃyutta, 5.2, *Somā Sutta*, 소마의 응답 게송. [원문·본문 확인](https://suttacentral.net/sn5.2/en/sujato)
‘두 손가락의 지혜’는 마라가 여성을 낮추어 부르는 표현이다. 소마의 응답은 이 모욕이 전제하는 수행 능력의 위계를 거부하고, 집중과 지혜가 성취되는 조건으로 논의를 돌린다.